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장백산-1 2017. 8. 21. 12:52

산빛노을(원광), 2017.08.21. 07:53  http://cafe.daum.net/okryunam/FIdg/987 


10.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달마의 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의 맛을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사람은 하루에 세 그릇의 우유죽(만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그릇의 우유죽(만나)는 무엇에 관련된 말입니까?"


이 물음은 달마의 어록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전과 주석에도 자주 나타나는 질문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대는 아마 그 말 뜻을 모를 것이다. 그들은 지금 매우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지 일상적인 일을 마치 대단한 우연한 일 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배가 고팠고 누군가가 그에게 우유죽을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구도자가 묻는 물음은 그 물음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들은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진짜로 놀랍다. 그 구도자는 그런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대가 질문한 말이 바로 석가모니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우유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이 두 가지 우유죽이 바로 그대가 초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우유죽에 어리석은 사람들의 한계가 있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우유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부처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순한 우유죽이 아니라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신 것이다. 다르마의 우유죽은 보통의 우유죽이 아니다. 종교적인 우유죽이다! 다르마의 우유죽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다르마의 우유죽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우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우유죽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르마의 우유죽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우유죽이 종교적인 우유죽이 될 수 있는가?


세 그릇의 우유죽란 삼학(戒, 定, 慧 三學)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의 우유죽이란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불성의 열매의 맛을 맛보게 한 순수한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중상하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석가모니부처 그는 세속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썩지 않고 정욕도 없는 다르마 자체를 마신 것이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 불순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는 앞에서 여러 차례 달마가 "그대의 내면은 항상 순수하며 그대의 내면은 어떤 방식으로도 오염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이제 달마의 제자들은 사람이 자신의 불성(佛性)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우유죽을 마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궁지에 몰린 나머지 다르마 우유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자가당착이다.


경에 일렀으되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첫째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암소만이 젖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르마 우유죽은 오직 황소에게서만 나온다. 이 어록은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에게 보내졌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그는 매일 다르마 우유죽을 마시고 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젖을 마시고, 다시 자신의 몸에서 젖을 짜내어 그 젖을 마신다. 그는 아마 어떤 부처보다도 더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 황소는 실수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앞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가모니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그들은 암소와 황소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경에 일렀으되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이 황소는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이 황소는 암소와 함께 살지도 않는다." 만약 암소와 함께 산다면 불순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 황소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바로 비로자나부처(毘盧遮那佛)이다. 모든 존재를 향한 비로자나부처의 대자비심으로 인해서 비로차나부처의 몸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이라는 순수한 우유를 만들어내고 순수한 우유인 삼학과 육바라밀은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양육한다. 그런 순수한 法身, 비로자나부처에서 나오는 순수한 우유, 즉 삼학과 육바라밀은 여래를 낳게 하고 불성을 성취하게 한다. 삼학 육바라밀인 순수한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영원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그대는 매우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어디서 다르마 황소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으니 한 유명한 힌두교 승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힌두교 종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 묵었는데 그는 오직 우유만 마셨다. 그것은 그만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 힌두교 승려와 사흘을 함께 있었는데, 그가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우유는 반드시 흰 젖소에서만 나온 우유이어야 했다. 절대적으로 흰 젖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힌두교 승려에게 물었다.

"나는 그대의 수행을 방해할 뜻은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이 검은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는 먹지 않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우유는 항상 흰색이다. 그런데 뭘 그리 걱정하는가? 그리고 검은 반점이 하나만 있어도 그 소에게서 나온 젖을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에 많은 젖소들이 그 힌두교 성자에게 검사를 받았다. 절대적으로 흰 젖소인가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젖소를 선택하고 나면 목동은 젖은 수건으로 젖소를 목욕시켜야 했다. 어떤 오물이나 먼지도 젖에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흘 동안 그 힌두교 승려의 바보 같은 행동을 보고 있던 나는 지쳤다. 나는 그때 달마 어록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달마 어록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흰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만 마시는 일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대는 흰 젖소에게서 나오는 젖만 먹는데, 흰 젖소가 아니라 흰 황소에게서 나오는 젖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흰 황소의 젖은 흰색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황금빛색일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위대한 수행이 되는 것이리라.


달마의 제자들은 스승을 위한답시고, 스승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사실 그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불교의 문제뿐만 아니다. 모든 종교에서 같은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자이나교의 성자인 마하비라는 앉은 자세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그 앉은 자세가 좀 별스럽다. 그것은 요가에서 '소젖 짜기 자세'라고 불리는 자세였다. 인도에서는 젖을 짜는 데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발 의자에 앉아서 손으로 소젖을 짠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무엇을 했던가? 그는 결코 소젖 같은 것은 마시지도 짜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했을까?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 있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모라르지 데사이에게 물어 보라.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라.


"그대는 완벽하게 할 수 있다. 잘 들어라. 먼저 소젖 짜기 자세로 앉아서 젖을 짜 모아라. 그리고 그것을 마셔라. 그러면 깨달음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마하비라 이후에 자이나 승려들은 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는 충분히 오랫동안 그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없다. 그 자세는 매우 이상한 자세이다. 명상을 하려면 먼저 충분히 심신이 편안하게 이완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하비라의 자세는 매우 긴장된 자세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사람들은 마치 그 자세 때문에 그가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 데는 어떤 자세도 필요 없다. 깨달음은 그대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오직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생겨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말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다. 나는 드디어 깨달음을 성취해냈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 그대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없다(無我). 나는 없기 때문에 침묵이 흘렀고, 오직 수용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깨달음이 일어났다."


깨달음은 햇살이 꽃에 비치면 꽃잎이 열리는 것 이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대를 초월한 어떤 것이 그대 속으로 들어와, 그대의 연꽃잎이 열리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나오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어떤 원인도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는 과학적인 용어이다. 원인과 결과는 내면의 신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면의 신비에는 어떤 원인이나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불성, 깨달음, 깨어있음, 해탈, 그것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내면에 있다. 불성, 깨달음, 깨어있음, 해탈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원인도 필요 없다. 그것은 그저 보여질 뿐이다. 그대는 시선을 돌려 내면으로 향하라. 그대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의 발견이다. 황금시대를 열기 위해서 불성, 깨달음, 깨어있음, 해탈은 언제나 그대 내면에 완벽하게 있어 왔고, 그래서 그대는 어느 순간엔가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성, 깨달음, 깨어있음, 해탈에는 어떤 미세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因果法)도 개입되지 않는다. 단지 그대의 의식을 내면을 향하여 눈을 뜨라. 나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항상 외부를 향해 열려있다. 명상은 내부로 마음의 문을 연다. 마음은 하나의 문이고 마음이라는 문을 통해 그대는 세상으로 나간다. 명상 또한 문이고 그대는 명상이라는 문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온다. 나라는 존재(存在)의 핵심(核心)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갑자기 그대는 깨닫는다.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결코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마도 이 사실을 알았다. 달마 자신의 깨달음도 갑작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전통에 반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어떤 운동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기 전에 달마가 그의 스승과 약속한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이 못마땅하다.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의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모든 불교가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을 것은 없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서로의 규약을 굳게 지켰다. 아마 그것 때문에 나중에 불교가 핍박을 받았을 때도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만은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