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는 늘 활기로 가득 차고 생기 발랄하다.
불가(佛家)에서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몇 개를 든다면, 그것은 아마 '없다(無)', '비었다(空)' 혹은
'아니다(非)'일 것이다. 無, 空, 非와 같은 단어를 불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이러한 사실은, 견문각지
(見聞覺知)의 모든 대상 모든 경계를 의심할 여지없는 실제(實際)인 줄로 여기고, 그 환상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범부들로 하여금 그 미망(迷妄)에서 헤어나게 하기 위해, 옛 성인들이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요즘은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無, 空, 非의 참
뜻을 깊이 사무치지 못한 채, 그저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상투적인 말' 정도로 치부(置簿)해 버리
거나, 혹은 상대적 이분법적인 분별심으로 無, 空, 非라는 말들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해석하기 일쑤이다.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외통수인 사람들은 ··· 지금까지 '나'의 안락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
시키기 위해 열심히 궁리하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나'였는데, 그런데 이 '나'가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지혜'도 없고, '힘'도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상대성 이원성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는 이승(二乘)의
근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가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지혜도 없고, 힘도 없는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라는 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묵살해버리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지던가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眞實한 法>은 중생의 망령된 사량계교(思量計較)가 미칠 바가 아니며, 말로 표현이 불가능
하기에 따라서 진실한 法에는 <두 法>이라는 분별이 있을 수 없고 한 法도 없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
자면 「두 法이 있을 수 없다」는 이 말도 벌써 진실한 법, 즉 '진리'에 상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아직 진리에 안목이 열리지 못한 학인들이 <종문(宗門)의 전통적인 方便의 틀>에 갇혀서 치우
치게 <생각 없음>(無心 無念 無想)을 추구하던가, <말함이 없음>(無言)이나 <함이 없음>(無爲) 등에
떨어져서 그 속에 안주한다면 이야말로 <일 없음>(無事)의 수렁에 빠져서 전혀 운신이 자유자재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당하여 선현(先賢)들은 「고인 물 속엔 용이 깃들지 않느니라」
하여 그 허물을 경책했던 것이다.
요약컨대, '法의 본래 法'은 '법'(法)도 아니고(非法), '법 아님'(非法)도 아닌데(非非法), 옛 성인들은
이와 같이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法'을 가지고 널리 교화문 (敎化門)을 베풀어서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숱한 方便의 말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결코 말이나 문자나 분별 망상 생각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본분납자들은 <있다 有>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없다 無>까지 마저 보냄으로써 淸淨한
'본래 마음'에 티끌만한 한 法도 붙여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보살'(一乘菩薩)은 <있음>에 집착하여 있음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凡夫들과도 다르고, 일승보살은 또한 모든 세간법(世間法)을 미세하게 깨달아 살펴서 모든 세간법
들이 전부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無自性)이라고 보아, 막무가내로 모든 세간법들을 털어버리는
이승(二乘)들과도 다르다.
그리하여 헛되이 과보(果報)를 챙기는 일이 없는 일승보살은 누진통(漏盡通)을 증득하는 일도 없으며,
시끄러운 시장바닥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도 결코 시장바닥에 물드는 일이 없는 '淸淨한 제 성품'
(淸淨自性)에 회귀하여, <원만한 기틀>(圓機)을 갖춤으로써 다만 <'앎'에 즉하여 '앎이 없고'>, <'함'
(爲)에 즉하여 '함'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령한 성품>(靈性), 근본성품을 결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가려서 어둡게 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요즘에 출가한 사람들, 중들이 모든 세속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오직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인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는데, 대뜸 「'마음'이 그대로 '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法도 없다」고 하던가,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니, 결코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나 '보살'에게 예경(禮敬)하지 말라」고 하던가,
또는 「'불성'은 모든 사람에게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새삼 배우고 갈고 닦고 하는
것이 다 허물로 돌아가느니라」하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 출가승들은 중생의 치우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이와 같은 성인들의 方便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핏 나름대로의 망령된 知見을 일으켜서, 「모든 법성(法性)이 空해서 한 法도 취할 것이 없다」는
또 하나의 치우친 知見을 짓고는 치우친 그 知見속에 들어앉아서, 더 이상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혼침(昏沈)에 빠져서, 마치 고인 물이 썩듯이 아주 가라앉아 버리니, 이것은 바로 모든 학인들이
마땅히 삼가야 할, 이른바 저회주의(低徊主義)에 빠지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어찌 성인(聖人)들의 뜻이 이렇게 온기도 없이 식어버린 재(灰)처럼 되는 것에 있었겠는가? '佛法'이란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法의 실상(實相), 진실한 모습을 활짝 깨쳐서 일체의 장애가 완전히
사라진 마음은 가장 活氣로 가득차고 생기(生氣) 발랄한 마음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경우 '활발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펄떡펄떡 뛰노는 모습만큼이나 生氣 찬 모습을 이르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부처'도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없으니,
본래 청정한 마음 거기에는 없다는 것도 없어서 그저 맑디맑은 '虛空性'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저
'虛空'은 아무런 知覺도 없고 아무 作用도 없는 데 비해서, 우리의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마치 두꺼운 먹구름이 활짝 걷힌 뒤의 맑고 푸른 하늘처럼 더욱 맑고 밝은 活氣로 충만한,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본래 청정한 마음 그곳에 무엇이 있어서, 무엇을 장애하고, 무엇을 제한하고 제약하겠는가?
도무지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걸쳐서, 우주전체에 걸쳐서 막히고 거칠 것이 없으니, 이쯤 되면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활발발이라는 말조차도 구차해지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 그곳은 끝내 상대
(相對)가 끊어진 絶對性의 자리로, 그곳에는 집착해야 할 만한 法도 없고 버려야 할 만한 法도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있다'는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다 놓고, 놓았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서, 마음에
눈에 보이지 않는 티끌 먼지 하나도 붙을 데가 없어야, 그때 비로소 <깨달음의 성품>(覺性)에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우거사님의 일승법문 중에서-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래 이미 완전한 삶 (0) | 2017.09.05 |
---|---|
'무명(無明)'도 본래 없고, '부처(佛)'도 본래 없음을 알면 이것이 곧 '불과(彿果)'이다. (0) | 2017.09.02 |
이 세상 모든 것들의 본질, 본바탕은 (0) | 2017.09.01 |
29.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오직 하나만 아는 바보-중 (0) | 2017.08.31 |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오직 하나만 아는 바보-하 (0) | 2017.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