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明)'도 본래 없고, '부처(佛)'도 본래 없음을 알면 이것이 곧 '불과(彿果)'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애타게 바라는것은 <구경(究竟)의 지위>,
이른바 <최후의 종교적 체험>을 증험(證驗)하는 일이다. 이렇게 未來에 얻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과보
(果報)를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어서 부지런히 갈고 닦는 행위가 곧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온 '수행'이니,
'고행'이니 말하는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열심히 인행(因行, 原因이 되는 行爲 )을 닦음으로써 未來의
과보(果報)를 기약하는 것,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온 '修行'의 기본 틀이다. 그러나 未來의 果報를
기약하는 修行이 世間의 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하는 修行라면 응당 그렇게 원인이 되는 행위를 修行
해야 할 것이다. 즉 世間法에서는 인과법(因果法)이 엄연히 성립하는 것이며, 아니, '世間法'은 바로
'因果法'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필칭 '불법'(佛法)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불법공부의 수단으로써 '세간법'에 의지하는 것은,
마치 산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미 存在의 實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不生不滅, 不來不去의 이치>를
밝혔다. 즉 모든 존재를 겉으로만 볼 때에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生成과 消滅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생성 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겉모습만이 그렇게
생성 소멸하는 것 처럼 보일 뿐, 모든 존재의 실상, 즉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은 전혀 생성 소멸이
없다는 사실(불생불멸 불래불거)을 밝혀낸 것이다.
原因이 있어서 結果를 부르고, 그 結果가 다시 原因이 되어서 다시 새로운 結果를 부르는, 이 인과관계
(因果關係)의 견고한 고리는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엄연한 진실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인과의 법칙'은 어떤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와 상관이 없이, 지금도 엄연히 성립
하는 '진실'이다. 마치 '地動說'이 엄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여전히 해는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동설'이 제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인과의 법칙'도 역시 우리 인간들의 지극히 근시안적인 안목이 빚어낸 '오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원인'이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결과'가 나중에 일어난다는, 이 거의 부동의 진리로 여겨졌던 사실은
이제 <생겨남(生)이 없는 이치> (無生法忍)에 의해서 완전히 빛을 잃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
'인과의 법칙'은 다름 아닌 바로 '인과의 법칙' 그 자체에 의해서 송두리째 부정된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일체 만유는 다만 因緣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는 이 지극히 평범한 연기설(緣起說)의 주장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눈에 박혔던 가시를 빼주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체 만유는 다만 인연
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뿐이다」라는 연기설 이 말은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일체
만유는 다만 因緣으로 말미암아 생성되고 소멸할 뿐이기 때문에 따라서 일체 만유 그 자체로는 고유의
성품이 없다」는 이 말은 곧 연기설의 근본을 이룬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他, 因緣 )에 의존해서만
일체 만유 그 존재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말이다.
어떤 사물이나 물건이 「그 자체의 고유한 성품이 없다(無自性)」는 말은 곧, 「그런 사물이나 물건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여러
인연들이 어우러져서 온갖 사물이나 물건이 생겨난다」는 '연기설'의 주장을 되돌아보건대, 대체 그
<여러 인연>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마치 허깨비(幻) 같은 것들이 어울려서
한 물건이 생겨났다」는 뜻이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
이쯤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연기'(緣起)가 아닌 것을 '緣起'인 줄로 여기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문득 망연자실하여 정신적 공동상태(空洞狀態)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佛法'의 根本을 이루는 <불생불멸(不生不滅) 不去不來의 이치>다. 결국 사람들은 '因果'가 아닌 것을
'因果'인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결국 '일승법문'(一乘法門)에 있어서의 '불과'(佛果)란 곧 <인과가 아닌 인과>인 것이다. 따라서 一乘法은
범부들이 매양 끄달리면서 인과가 아닌 인과에 갇혀서 꼼짝 못하는 '因果法'과는 같지 않으며, 또한 외도
(外道)나 이승(二乘)들이 '인과'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과도 같지 않는 것이니, 곧 이것은 '佛果'라고 할
만한 佛果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 단지 '佛果'가 되는 것이다.
요약컨대, 이 경지에 이르러선 사람들 각자의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온전히 '불과'(佛果)
와 똑같아서,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 그 자체가 항상 진실한 <본래의 큰 지혜>임을 깨쳐서, 새삼 닦고
조작하고 할 것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지금 여기의 몸과 마음 이 자체가 온전히 '부처'인 것이다.
비록 아직은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그 힘과 작용함에 있어서 '대성'(大聖)과 같을 수 없지만,
이것을 곧 이르기를, 「그 몸과 마음에 부처종자(佛種子)를 심어두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의 본연작용으로 막 발현하는 마음(初發心)은 온전한 깨침(정각正覺)과
같다(初發心時便正覺)」는 것이며, 또한 「'부처 집안'(佛家)에 태어나서 '부처의 참 자식'이 되어, 이미
'부처 지혜'와 더불어 전혀 다름이 없다」는 말의 참뜻인 것이다. 천년 묵은 잡새가 오늘 아침에 갓 태어난
'봉황새'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뜻 있는 학인이 힘쓰지 않겠는가?
-현정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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