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본래 이미 깨달아 있다
깨달음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깨닫기 전에 깨달음을 ‘주장하는 존재’가 사라져야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분별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깨달음을 터득한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생각한다.’라는 두 번째 단어 또한 틀렸다. 생각이 깨달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생각은 깨달음과는 아득하게 동떨어진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쉬지않고 올라오는 생각 생각들이 그대를 생각들의 진흙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분리 분별하는 생각은 그대의 눈을 가려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분리 분별하는 생각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분리 분별하는 생각은 왜곡의 체계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분리 분별하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오쇼, 내 생각에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사랑이 생각의 부분인 것처럼 말한다. 사람들은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을 느낍니다.’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내 생각에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조차도 하나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랑이 생각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오직 느낌이 될 뿐이다.
여기 세 가지의 층이 있다. 첫 번째 층은 생각이고, 두 번째 층은 느낌이며, 세 번째 층은 존재이다. 그대는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생각보다 높은 차원의 에너지이다. 사랑은 생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다. 사랑을 느낄 수는 있지만 생각으로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달음도 느낌조차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한다. 사랑이 생각을 초월하는 에너지 이듯이,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하는 에너지이다. 그대는 다만 깨달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이나 느낌으로 깨달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언제나 영원히 무시무종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그저 있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 있다.
그대는 본래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다. 누구도 깨달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장차 일어날 일이 아니다. 깨달음은 본래 이미 엄연한 사실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현존하고 있다! 깨달음은 영원히 언제나 무시무종으로 상주불멸,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진실생명, 영생, 텅~빈 바탕 진공의식, 텅~빈 바탕 순의식, 본래의 나, 근원의 나이다.
깨달음이 바로 그대의 근본성품이다. 그대의 근본성품에 쌓아온 온갖 쓰레기, 즉 분별 망상 번뇌를 치워버려라. 그것이 그대가 할 일 전부이다.
오쇼의 <피타고라스> 중에서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人生到處知何事 인생도처지하사 (0) | 2017.09.26 |
---|---|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의 세계다. (0) | 2017.09.25 |
뭘 하던지 제 근본성품을 더럽히지만 말라 (0) | 2017.09.23 |
內外明徹(내외명철) (0) | 2017.09.23 |
한 덩어리의 이 세상, 이 우주 (0) | 2017.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