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라마나 마하리쉬 가르침의 정수 요약

장백산-1 2017. 10. 6. 15:04

라마나 마하리쉬 가르침의 정수 요약 | 영원한 나를 찾아서


가산|2017.10.06. 12:57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7328


"빛이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참자아를 깨달으면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이 저절로 사라진다. 그대가 참자아이다, 그대가 참자아 자체이다." (라마나 마하리쉬)

 

'20세기 인도의 성자’로 불리우는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Sri Ramana Maharishi, 1879~1950). 

칭찬에 인색했던 오쇼 라즈니쉬는 그를 가리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분”이라고 극찬했고, 

달라이 라마는 “그의 영적인 위대성은 수백만 사람들의 길을 비춰 주며 고통받는 인류에게 위안을 

준다”고 존경했다. 

 

그가 입적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는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승의 한 사람이며,(또한사람은 

아이 엠 댓의 마하라지 이다) 아루나찰라에 있는 그의 아쉬람에는 오늘도 세계 각지에서 오는 구도자

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얼마전 입적하신 지산 스님(이호준)의 <나는 누구인가>(청하)를 시초로 대성 스님이 번역

한 <바가반과 함께 한 나날>(탐구사)을 비롯해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라마나 마하르쉬와 진아

지의 길> <무심(無心)-나는 진아다> 등 19권에 달하는 아루나찰라 총서를 잇달아 펴내 수행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불교 특히, 선(禪)과 가장 유사한 가르침을 전한 인도 성자로 평가받고 있는 마하리쉬. 그의 가르침은 

어떤 점에서 불교 수행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것일까.

 

아루나찰라 총서에서 드러난 마하리쉬 설법의 특징은 종교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진아

(眞我)를 직접 체험케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 점은 禪에서 쓰는 直指人心 見性成佛과 비슷하다

 

마하리쉬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래 이미 완전무결한 實在로서의 자신의 근본성품(본성)을 망각해서 

生과 死의 윤회(輪廻)를 거듭하며 고통받는 이유는 인간이 육체나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아는 무지 

때문이리고 말한다. 

 

따라서 ‘육체가 나’라고 동일시 하는 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에고를 소멸하면 순수한 존재이자 순수

의식인 ‘진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에고(자아의식)은 에고 밖으로 세계를 투사

(投射, 投影 투영)하여 이 세계와 에고 자신의 육체가 실재한다고 착각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에고가 에고 바깥으로 투사한 세계 이러한 세계는 마치 꿈속에서 의식이 만들었던 꿈속 세계처럼 

실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幻)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각자의 에고를 소멸하면, 투사된 이 물리적 세계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소멸되고, 이때 자신의 참된 근본성품(본성)인 眞我가 찬연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일체처에 두루 충만하고 일체시에 항상하는 永遠한 實在, 모든 것의 근본 眞實生命임을 깨치게 된다.

 

뛰어난 깨달음의 지혜, 고매한 인격과 가장 단순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이상과 실천이 

지금도 유효함을 입증했다는 마하리쉬. 간화선의 ‘이뭣고’ 화두와 유사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

으로 집약되는 ‘자기탐구’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길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했

다고 평가받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알아본다.

 

■진아(眞我)란 무엇인가? 마하리쉬의 ‘진아’는 단순한 ‘無我’ 개념의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有我와 

無我, 非有我와 非無我를 넘어선 개념이다. 진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일체의 분별하는 생각 마음의 작용이 끊어진 곳, 궁극적인 그 무엇, 즉 해탈 혹은 열반(니르바나)의 

상태를 가리키는 방편의 말이다. 

 

불교에서는 眞我(진아)라는 방편의 개념을 불성, 본래면목, ‘한 물건’ 등으로 표현했다. 즉 진아, 불성 

본래면목 등의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상의 용어는 해탈 열반(니르바나)의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방법상의 말이지, 남방불교 수행자들의 지적처럼 어떤 영원불멸한 실체의 있고 없음 그 자체를 말하

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용어도 언어를 넘어선 그 궁극의 상태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대성 스님은 

이에 대해 금강경식의 어법을 빌려 “진아는 곧 진아가 아니니, 그 이름이 진아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무아(無我)를 깨닫는 길? 그러면 어떻게 이 에고(有我), 즉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

에서 벗어날 것인가. 마하리쉬에 따르면 에고를 소멸하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를 통해서 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즉 에고의 근원을 추적하여 그 실체를 규명

하는 것이다. 요가(호흡제어와 마음제어), 헌신(신에 대한 숭배), 행위(사회적 봉사) 등 다른 모든 수행

은 궁극적으로 이 ‘나는 누구인가?’의 자기탐구에 이르는 방편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법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화장터

의 장작불을 쑤시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는 그 물음 자체도 소멸됩니다. 이때 거기서 진아, 깨달음

(Self-realization)이 일어납니다.” 

 

마하리쉬는 ‘나는 누구인가?’란 의문을 끊임없이 착파하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생각이 일어

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꾸준히 물어야 

합니다. 이때 나오는 답은 ‘나에게서’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해 나가면 

인간의 분별하는 마음은 마음의 근원, 근본성품에 머무르는 법을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이뭣고’와 다른 점 ‘나는 누구인가’란 탐구법은 흔히 간화선의 ‘이뭣고’와 비교된다. ‘이뭣고’ 화두가 

오로지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을 강조하는 반면, ‘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있다’는 각성을 물고 늘어지

라고 하는 점이 다르다. 

 

마하리쉬는 (육신의 나가 아닌) ‘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대한 자각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만이 누구에게나 영속적이며 자명한 경험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내가 있다’만큼 자명하지

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하는 것, 즉 감각기관을 통한 경험은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자기

(진아)만이 自明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탐구를 하여 ‘내가 있다’가 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내가 있다’가 實在입니다. ‘나는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라고 분별하는 실재가 아닙니다. ‘내가 있다’가 

진리이며, 진아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깨달음 - 해탈(열반, 니르바나)이란? 마하리쉬는 “속박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근본성품을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근본성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라고 말한다. 禪에서 말하는 마음을 밝혀 근본성품을 본다

라는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유사하다. 마하리쉬는 ‘인간의 근본성품은 이미 해탈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해탈은 인간의 근본성품입니다. 사람이 바로 근본성품이자 해탈입니다. 사람들이 해탈을 희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모든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사람의 근본성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깨달음, 해탈, 근본성품 그것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속박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힘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사람들이 속박되어 있다는 그릇된 환상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달음, 해탈을 바라는 한, 그만큼 오래 우리는 속박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깨달음, 해탈은 그것을 바라는 집착이나 분별심이 조금만이라도 남아있는 한 성취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을 쉬고 무심(無心)해질 때 본래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는 자신의 근본성품을 

확인하게 된다는 禪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마음과 진아의 차이?  마하리쉬에 따르면 마음과 진아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곧 

진아요,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에고(자아의식, 분별의식, 분별심)와 모든 세계(현상세계)로 드러나게 된다. 

 

그는 마음과 진아의 관계를 ‘거미와 거미줄의 비유’로 설명한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몸 안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마음 밖으로 현상세계를 투사했다가 현상세계를 다시 마음 안으

로 흡수한다. 

 

마음이 마음 밖으로 나올 때 현상세계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현상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진아

는 나타나지 않고, 진아가 나타날 때(빛날 때) 현상세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하리쉬는 “사람들이 분별하는 마음(에고의식, 자아의식, 분별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탐구

해 들어가다 보면 분별하는 마음은 진아(깨달음, 해탈, 열반, 니르바나, 근본성품)만 남겨놓고 스스로

사라져버린다”고 말한다.  


출처 :逍遙遊(소요유) 원문보기▶   글쓴이 : 山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