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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分別) 망상(妄想) 번뇌(煩惱)와 깨어있음의 원리

장백산-1 2017. 10. 14. 18:43

분별(分別) 망상(妄想) 번뇌(煩惱)와 깨어있음의 원리


무수히 일어나는 분별 망상 번뇌는 아주 자연(自然)스러운 현상(現象)입니다. 왜냐하면 분별 망상 번뇌는 

아상(我相)이 만들어 내는 현상이거든요. 아상(我相)이 뭐라고 그랬어요? 아상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생각, 쉽게 말해, 내가 만들어낸 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 내가 만들어낸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생각을 아상(我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으로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 허상(虛想), 이게 아상(我相)입니다. 

내가 만든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 진짜 참된 實相이 아닌 허상, 헛된 妄想이라는 거죠. 


사람들은 끊임없어 머릿속에서 생각을 일으켜 온갖 상(相)을 만들어 낸단 말이에요. 생각을 만들어 내고, 

그게 我相인데, 아상 그걸 가지고 온갖 분별, 망상, 생각, 번뇌, 잡념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분별 망상 생각 번뇌 잡념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냐? 그건 문제라고 할 수가 없어요. 분별 망상 생각

번뇌 잡념이 일어난다고 해서 나는 수행자도 아니라고 나는 왜 이렇게 수행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라고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분별 망상 생각 번뇌 망념 잡념 그건 당연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

이에요. 왜냐하면 부녈 망상 생각 번뇌 망념 잡념이 일어나는  그게 아상의 특성이니까. 


아상, 즉 ‘나’다 라는 생각이 있게 되면, 저절로 아상은 끊임없이 분별 망상 생각 번뇌 망념 잡념을 만들어 

내요. 그게 아상이 하는 일입니다.  그럼 이 아상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상과 싸워 이기려 할 필요가 

없다. 지눌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觀察)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라.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나면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났구나 라는 사실을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은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날 때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나는 순간, 그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을 가만히 한번 살펴보란 말이죠. 관찰해 보면 그것들은 저절로 사라져버립니다. 그것들과 막~

싸워가지고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건 

저절로 사라진다. 


그래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관(觀)입니다. 위빠사나, 관(觀)이에요.  마노은 수행법이 있지만 모든 수행법에 

관(觀)이 들어가지 않으면, 지관(止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염불(念佛)에도 지관(止觀)이 들어가요.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마음을 그치고(止),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을 그치고(止), 내가 염불하고 있다, 라는, 염불하고 있는 나 자신을 온전히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거에요. 입으로는 염불을 하지만 머릿속으로 온갖 분별 번뇌 마아상 잡념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분별 번뇌 망상 잡념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염불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죠. 


온갖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들끓는 것을 화두라는, 염불이라는 어떤 방편, 수행의 재료를 들고, 마음을 

그치고(止), 분별 망상 번뇌 망상 잡념을 관찰(觀察)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불을 통해서 

마음을 관찰하기 위해서 염불 하는 거에요. 절 수행을 하는데, 몸은 지금 여기에서 절을 하면서 마음은 

딴데 가 있다. 그건 절수행이 아니죠.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몸이 있는 곳 지금 여기에 마음도 같이 있는

게 수행입니다. 몸은 어디에 있어요? 지금 여기에 항상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몸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딴데 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몸과 마음이 분리가 되면 수행이 되지 않는 겁니다. 몸있는 곳에 마음이 있을 때, 마음도 같이 있고. 

그러려면 관찰을 해야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만 관찰할 수 있죠. 과거나 미래를 관찰하는게 아

니고,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증명해 주는 게 뭐가 있겠어요? 호흡(呼吸)이 있습니다. 

날숨 들숨입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있다? 라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입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죠. 


그래서 옛부터 불교에서는 호흡관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호흡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호흡을 지켜볼 때 분별 번뇌 망상 잡념이 멈춘단 말이죠. 지금 이 순간 고요해 지고 지혜

(智慧)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어요.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다. 마음 하나 관찰하는 

법, 그 한 가지 진리가 제행을 총섭한다. 일체 모든 진리다운 행을, 총섭하는 불교를 한마디로 뭐라고 할 것

이냐? 물어보면 관(觀), 이 한마디로 끝날 수 있습니다. 불교는 관(觀)하는 종교다. 이 관(觀)이 八正道에는 

정념(正念)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어요. 정념. 정념이 마음을 관찰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 

계정혜(戒定慧)에서는 觀이 慧를 의미하고, 또 근본불교에서 교리에 보면은 정념에 대한 세부적,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사념처(四念處) 수행이 있습니다.


사념처(四念處), 즉 신 수 심 법(身 受 心 法)이라는 네 가지 관찰을 할 대상이 나옵니다. 

신념처(身念處), 몸을 관찰하는 거에요. 그리고 수념처(受念處) 느낌을 관찰하는 거. 

그리고 심념처(心念處) ,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거. 법념처(法念處), 존재와 진리를 관찰하는 거. 

그래서 身受心法을 관찰하는 수행 이게 근본불교에서 위빠사나라고 이름하는 사념처 수행입니다. 

사념처(四念處) 수행 이게 불교 수행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관(觀)하지 못한다면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觀)할 때만 

사람들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깨어있을 수 있어요. 불교에서 말로 쉽게쉽게 깨어있어라, 깨어

있어라 한단 말이에요. 깨어있으라는게 무엇인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관(觀)하고 있으라는 겁

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