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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창조할까? 창조를 넘어설까?

장백산-1 2017. 9. 19. 10:43

삶을 창조할까? 창조를 넘어설까? 

                                      

삶을 만들어내는 창조행위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잘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의심의 크기만큼 반대로 

내 삶을 내 뜻대로 창조해내지 못하는 우주법계의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내 마음을 일키는 대로 내 삶을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 말은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세상을 창조한다 것은 

그것이 바로 業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이고 의도적 행위(行爲)가 곧 업(業)입니다. 


인간이 의도적 의지적으로 짓는 행위, 곧 業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도 業(口業)이고 , 의지적인 행동도 業(身業)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이 세 가지 業 그것은 내 삶을 창조하는 도구, 방편, 수단이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業을 짓는 거예요. 

業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業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겠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 내 인생, 내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에 세 가지 업으로 내 세상, 내 인생, 내 삶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 인생, 삶을 창조하는 삶을 살지 말고, 대신 긍정적인 세상, 인생, 삶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그러한

아주 행복한 삶, 세상, 인생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내 생각 마음, 내 말, 내 행동, 즉 三業으로 내 세상, 내 인생, 내 삶을 창조하는 방법 이것은 어디

까지나 수단 방편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내 세상, 내 인생, 내 삶을 창조하는 본질(本質)은 무엇이냐? 

내 삶을 창조하는 수단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근원의 내가 나의 삶을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우주법계, 내 안에 자성부처, 참나, 본래의 나에게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身口意 三業으로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자성부처, 우주법계에 내맡겨버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 가지 業으로 각자의 삶을 창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사람이 세 가지 業으로 창조하는 

삶은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창조가 아닙니다. 인간의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식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 무지(無知)이다 보니까, 나 혼자서만 잘되고 잘살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利己心)에 

기반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삶의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意業, 마음, 생각, 뜻, 의도, 의지를 갖고 내가 원하는 그 마음 생각 뜻 의도 의지대로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창조된 삶,

현실세계가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무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창조에너지, 즉 생각, 말, 행동으로 작업 해 놓은 것이 지금 여기 현재에 

이 세상으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즉, 세세생생을 거치면서 지어온 모든 三業의 에너지들이 모여 결과물인

果報라는 결과, 즉 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는 곧, 불교적 표현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원인인 三業을 변화시킴으로써 그 결과인 果報,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業은 곧 行爲를 말하는 것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業)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業 중에 근간이 되는 業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 의업을 사람들이 쉽게 말해서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業, 그 중에서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 마음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과보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業으로 세상을 창조해 낼수 있다는 이것입니다. 

우주법계로 業을 내보내면  그 業에 공명하는 과보가 끌어당겨져 온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業에 있어요. 業을 우주법계로 내보내면 당연히 과보가 끌어당겨져 오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반대로『시크릿』은 내보내는 業보다는 끌어당겨져 오는 과보에 초점을 맞춰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나의 業 내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내보내는 業(行爲)보다는 내가 받을 결과물인

果報가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신업, 구업, 의업 세 가지 業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결과)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하면 

業을 잘 지어서 果報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이 짓는 三業(생각 마음, 말, 행동 세 가지 행위)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

지만, 이 세상, 즉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껍데기 세상의 근원(본질, 근본)으로 들어가면 業도 공(空)

합니다. 


사람들이 선업, 악업이라고 분별하는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의 본질에서 보면 선과 악이라는 것도 

空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空한 業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펼칩니다. 業이라는 空한 幻影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果報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환영(幻影) 같은 空한 業 자체를 뛰어넘고, 

선과 악이라는 분별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業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 이 세상의 근원(본질, 근본)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에서 가르치는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을 합니다.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실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실행하는 것이 業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業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생각을 뜻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즉 三業이라는 구속을 뛰어넘는 방법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생각 말 행동이라는 세 가지 창조에너지로 좋은 業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써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을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칩시다. 그렇게 

했으면 거기에서 다 되고 다 끝난 것입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냥 

거기서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쪽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業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마음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나 환경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밝은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둘 사이가 조금 껄끄러워 지더라도 한 마디 해야 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과 악이라는 분별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라는 분별을 뛰어

넘고, 부와 가난이라는 분별을 뛰어넘어 더 큰 지혜, 밝은 광명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상 스님 -출처 : 목탁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