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죽음에 대한 이해

장백산-1 2018. 3. 10. 20:16

죽음에 대한 이해


들어가는 말

이번 봄. 어느 날 오랜 30년지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봐라 소식들었나? 무슨 소식? 휴대폰을 

들고서 한참 정적이 흘렀다. 목젓이 꼴딱하면서 직감적으로 우리 4놈중에 한놈이 갔구나 하는 직감이 

왔다. 그러면 전화 받는 나도 아니고 전화 거는 너도 아니고 그럼 나머지 둘중에 누구지. . . 왜?


그렇게 30년 지기 친구 4명중에 한 놈이 세상을 떴다..정말 그때 실감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많은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고 조문도 수도 없이 다녔지만 이렇게 죽음이라는 허망한 손님을 

급작스럽게 맞이하기는 처음이었다


3일장을 치르는 내내 영정 속 친구에게 물어보았다..그래 야 이 친구야 , 너가 세상을 떠난건 알겠는데..

근데 너가 어디로 가는지 또 갈 준비를 미리 하고 아무 미련없이 갔는지 궁금하다.. 친구야 죽는 공부는 

좀 하고 갔냐? 도대체 내가 안 느껴지니 친구야,


너는 죽음공부도 죽음 준비도 안하고 간 것 같아,,, 에이그 그래,,내보고 3일간 목탁치고 왕생극락 염불

이나 해달라고,, 지 힘으로 해결 안하고..,,ㅉㅉㅉ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똑똑 ... 목탁소리와 어울려 박자를 맞춘다..


● 풀어보는 말


막연하게나마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굳이 죽음을 손님이라고 비유한 것은 참으로 죽음을 다정스럽게 끌어안을 수도 그렇다고 배척

할 수도 없는 그런 대우를 하여야 하는 애매모호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이 손님을 

사람들은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단지 죽음이라는 손님이 좀 정중하게 다가 와 주길 바

래면서,,,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음이라는 이 손님을 극진히 모시고 적당히 삶과 함께 어울려 살다 떠나갈 때는 

훌훌 털어버리고 죽음이라는 손님이 아닌 죽음이라는 주인이 되어 떠나간다. 그럴 때 이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주인 되어 떠나는 죽음이라는 손님을 일합상(一合相)이라 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따라 하려한다.


아마 오랫동안 사람들은 주인으로 떠나간 죽음이란 손님 공부를 하고 또 죽음이라는 손님을 정중하게

예우하여 모신 그런 분들을 잊지 못한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성현이나  종교인들이나 그에 못지않은

삶을 산 분들의 모습일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손님이 자신을 찾아오면 호들갑을 떤다. 그런 호들갑도 없을거다.. 

천차만별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타박하고 죽음이라는 손님을 터부시 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손님은 

얄자없이 방을 차지하고 한껏 사람 혼을 뺀 후 남은 자들에게 이별의 상처를 남기고 허탈하게 떠나간다..


왜 죽음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말을 하는 걸까..그러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안도 

있고 바깥도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즉, 단지 세상 안과 세상 바깥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지, 죽음이라는

손님이 주인 되어 세상 속에 있다가 세상을 떠날 때 는 손님의 옷으로 갈아입는 차이 뿐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걸 세상 속의 사람들은 그렇게 잘 ~ 알면서 왜 정작 자신이 죽음이라는 

손님이 되어 떠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갈까.. 죽음이 각자 자신의 일인데.. 저 자신의 일이 

아닌 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내 죽음을 남의 죽음인것 처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가 손님으로 찾아오는냐 주인으로 떠나가느냐는 살면서 죽음을 얼마나 잘 예우하고 

죽음을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이라는 마음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일 것이다.


● 맺는말. . .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학술적인 정의도 각양각색이다. 사람이 손님으로 인생을 살았느냐 주인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한 이후 타인들이 그 죽음을 두고 각양각색의 단어로 별칭을 주고 있다.


물론 사회적 신분에 의해서도 죽음은 단어상 의미를 달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죽음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선종, 열반, 임종, 서거, 타계. 돌아가셨다, 떠났다 등의 각양각색의 단어들로 그 사람의 세상속의 

삶을 단어 하나로 정의 한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든 간에 사람들은 이 한마디에는 일치 하는 바가 있다. 그건 죽음이 육체적이고 물리

적인 종언을 선고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이고 육체적 종언을 고한 죽음을 별개로 하면 나머지는 정

신적인 죽음이 되어서 결국은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인 의미로 해결하게 된다.


그 종교적 죽음의 문제는 각자의 문제일 수밖에 없고 또 크게 보면 인류가 가지는 영원히 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인 유혹적인 숙제일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보는 바에 있어서 물리적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죽음 이후의 시신 처리 과정이 고인의 살아온 세상속을 정리하여

주는 과정이 아니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인과의 이별을 정리하는 과정에 맞추어 질수밖에 없는 것에서 ,

죽음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지배계급의 계급고착화에 큰 영향을 행사하게도 하고 사회윤리를 지켜주는 

절차상의 과정을 산출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로 근래에 들어서는 죽음은 윤리가치의 하락과 죽음의 상업화로 인하여 오

히려 죽음의 문제가 시장(市場)에서 또 다른 기회를 가져오는 일종의 일거리가 되었고 남은 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인 또 다른 손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단지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적인 죽음을 대하는 일반적인 글로써 알음알이로 사색하듯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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