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三身)도 결국은 참이 아니다。

장백산-1 2018. 5. 3. 16:24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三身)도 결국은 참이 아니다。


金剛經 冶父頌 83. 제6분 3-⑤


☞ 冶父(야부)。


三佛形儀總不眞(삼불형의총부진)하니 眼中瞳子面前人(안중동자면전인)이라. 

若能信得家中寶(약능신득가중보)하면 啼鳥山花一樣春(제조산화일양춘)이로다. 


삼불의 형상과 거동은 다 진실이 아니고 눈 속 눈동자에 비친 마주 선 사람이라. 

만약 집에 있는 보배를 믿기만 한다면 새 울고 꽃피는 것이 한결같은 봄이로다. 

 

‘세 부처의 모습은 다 진실이 아니다(三佛形儀總不眞)’함은 물을 예로 들면 물의 본성은 본래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것인데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불의 형상과 거동도 바람으로 인하여 있으니 다 진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밖에서, 형상에서, 불상에서, 절에서, 부처님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그러한 형상은 진정한 부처님이 아니고 그런 형상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주스님도 "쇠로 만든 불상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불상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진흙으로 만든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참부처, 진불(眞佛)은 세 형상 그 속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 송담스님 강설


삼불형의(三佛形儀)가 총부진(總不眞)이요  안중동자면전인(眼中瞳子面前人)이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 또 나무를 깎아서 만든 부처님, 쇠를 녹여서 주조해 만든 부처님, 이 세 가지 종류의 불상이 총부진(總不眞)이여. 세 불상이 다 참다운 부처님이 아니여. 왜 그러냐?


흙으로 만든 불상은 물에 들어가면 물에 풀어져 버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은 불 속에 들어가면 타 버리고, 쇠를 녹여 형틀에 부어 만든 불상은 용광로(鎔鑛爐) 속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 그말이여. 그러니 어찌 그러한 세 가지의 불상(佛像)을 참다운 부처님이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안중동자면전인(眼中瞳子面前人)이다. 눈 속 눈동자 속에 나타나 있는 그것이 바로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더라 그말이여. 사람마다 눈동자 속에는 앞에 있는 사람 모습이 있는데, 그 눈동자 속에 있는 모습이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여.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눈동자 있는 데에서 찾아봐야 그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비추어져 있다 그거거든.


약능신득가중보(若能信得家中寶)하면, 만약 능히 내 집안에 있는 보배를 믿는다면, 내 집안에 있는 보배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 평생 먹고 쓰고도 남을 보물의 구슬이 있었는데, 그 보주(寶珠)를 그 아들한테 전해 주어야겠는데 아들이 너무 어려가지고 그 보물을 전할 수가 없어서 그 아들의 옷 속에다가 그 보물을 딱 넣어놓고 그래 가지고 꽁꽁 꿰메서 잘 두었다 그말이여.


혹은 또 그 집안 어디다가 깊이 간직을 해 놨는데 아들한테는 일러줄 수가 없으니까, 자기의 친구한테 그것을 일러주었어. ‘내 자식이 철이 들거든 거기 그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켜 줘라’ 일러주고서 죽었는데. 그 아들이 부모가 죽어버리니까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되어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유랑걸식(流浪乞食)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말이여.


자기한테 그런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평생 쓰고 먹고 남을 보배가 있는 줄 모르고 그렇게 참 갖은 고생을 하면서 거지 신세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자기 아버지의 친구를 만났어. 그래 가지고 ‘바로 너의 그 옷 속에 보배가 있다’ 또는 ‘너의 집 어디에 가면은 그 보배가 있다’ 그래 가지고 그 보배를 발견을 해 가지고 평생토록 참 유족(裕足)하게 살았다 하는 그 경전에 있는 말씀인데.


자기 안에 있는 보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하면은 사람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그 주인공(主人公), 그것을 갖다가 집안의 보배에다가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신 거여.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리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아는 바로 그놈. 성내는 작용 울고불고하는 그러한 작용이 어디서 나오느냐? 그말이여. 탐심도 낼 줄도 알고, 고약한 마음도 내는데, 그 마음 낼 줄 아는 놈, 그러한 작용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그러한 작용이 일어나는 바로 그 당처(當處), 그것은 우리는 볼 수가 없어. 중생심으로는 당처, 그놈을 볼 수가 없고, 중생의 견해로는 당처,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거여. 더군다나 육안으로는 보 수도 없어.


그런데 그놈으로부터서 온갖 중생의 그 육식(六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당처, 그놈, 거기서 발동을 한다 그말이여. 그 발동하는 그놈을, 발동하는 그 근본, 그 당처(當處)를 진실로 터득해버리면, 그놈을 깨달라 버리면, 제조산화(啼鳥山花)가 일양춘(一樣春)이다. 지저귀는 새와 산에 피는 울긋불긋 꽃이 한결같은 봄이더라. 


봄이 돌아오니 산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고 새는 노래한다 이 말이거든. 거기에다 무슨 설명을 붙이고, 사족이나 설멸을 붙이면 그것은 깨달음의 소식이 아니라 중생의 망견(妄見)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출처: http://chamsonsajeon.tistory.com/172 [참선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