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불교신문
"배고프면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는 게 부처"
간화선 중흥을 위한 대선사 법회중계 - 지리산 상무주암 수좌 현기스님
데스크승인 2013.04.30 14:59:58 장영섭 기자 | 사진=신재호기자
지리산 상무주암에 주석하는 현기스님이 30여년만에 대중법문에 나섰다. 2013년 04월 30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 스님. |
청산백운 불리불합(靑山白雲 不離不合).
백운은 청산과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고 합쳐있는 것도 아니고,
청산이 백운과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고 합쳐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은 청산이고 저는 흰 구름입니다. 제가 청산이라면 여러분은 흰 구름입니다.
이러한 불리불합의 관계인 이 인연의 연기성(緣起性)은 만겁에 영원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염송(拈頌)>이란 책이 있습니다. 맨 앞의 말씀이 ‘세존이 도솔천을 여의지 않으시고, 왕궁에 내려오셨다. 모태에서 나시기 전에, 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셨다’입니다. 도솔천과 왕궁 사이엔 공간적 거리가 있습니다. 또한 ‘모태에서 나기 전’과 ‘중생을 다 제도했다’ 사이엔 시간적 거리가 있으므로, 상식적인 시각에선 모순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육식(六識) 경계로 보면 공간과 시간의 간격이 있는 것같지만, 원래는 그 간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무처무시(無處無時), 즉 공간도 시간도 없습니다.
자타 사이의 간격이 공간입니다. 자타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는 이유는 밖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육식(六識) 육근(六根)의 경계는, 뒤돌아 거슬러 올라가면 공간의 간격이 없어집니다.
예컨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환하게 비치면 1000개 강물에 1000개의 달이 형상으로 비칩니다. 1000개의 달이라는 숫자가 바로 공간입니다. 그러나 1000개의 강물에 비친 1000개의 달은 달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늘에 달이 있으면 따라서 강물에 달 그림자가 나타나고, 하늘에 달이 없어지면 강물에 달그림자 역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밖으로 보이는 우주만물 산하대지 전부가 다 본래는 실체가 없는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번개, 이슬 같은 것입니다.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면 꿈속의 영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이러한 환유(幻幽)가 사라지는 게 반야(般若)이고 정안(淨眼)입니다. 정안이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의 ‘비춤’입니다.
깨달음이란 꿈에서 깨어 세상의 실상에 눈을 뜨는 일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멸육도(生滅六道)가 일어나고, 한 생각 깨달으면 생멸육도가 사라집니다. 생멸육도가 사라지면 평상심(平常心)입니다.
평상심이 부처의 자리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성성(惺惺, 영리하게 깨어있음)함. 두 눈이 있어 보고, 두 귀가 있어 듣고 앉고자 하면 앉고, 서고자 하면 서고. 돌아서면 번뇌가 바로 끊어지는 자리가 부처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돌아섰는데도 번뇌 분별 망상을 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상(相)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상에 머무름이란 꿈을 꿀 때 나타나는 환유(환상)에 얽매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상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입니다.
중국 선종의 6조인 혜능스님은 출가 전 땔나무를 해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느 날 등짐을 지고 가는데, <금강경>의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머무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내라.’ 그 말을 듣자마자 육조 스님의 마음이 순간 열렸습니다. 깨달았다는 뜻이죠. 혜능스님은 곧바로 5조 홍인스님을 찾아갑니다.
홍인스님이 “너는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혜능스님은 “저는 영남 신주 땅의 백성인데, 제가 온 것은 부처를 이루고자 함이요 다른 일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홍인스님은 “영남 신주의 백성이면 양자강 이남의 갈료(오랑캐)인데, 천박한 자가 어찌 부처님 됨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혜능스님은 “사람에겐 남쪽 사람 북쪽 사람이 있지만 불성(佛性)에는 남쪽 사람 북쪽 사람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눈과 귀가 어리석어 밖으로만 내달리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5조 홍인과 6조 혜능 간의 만남은 부모 자식 간의 상봉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식이 태어나면 제 눈과 제 귀, 제 손발이 달려있으므로,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고, 제 발로 어디로든 갑니다. 육근 육식이 밖으로만 나다니니 부모와 자식이 헤어지고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도는 자식은 가난의 신고(辛苦)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춥고 배고프면 부모를 그리워하고 고향을 생각하며 철이 들게 됩니다. 타향살이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발길을 되돌리는 것, 이게 바로 발심(發心)이고 성불(成佛)입니다.
육조 스님의 설법을 담은 <육조단경>의 첫 머리는 ‘보리자성 본래청정’입니다. “깨달음은 자성(自性)이며 본래 청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그 마음은 곧 자성청정심입니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하는 본래 부처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털끝만큼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청정심은 경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가지가지의 법(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일어나고(心生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가지가지의 법(法), 이 세상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心滅種種法滅).
혜능스님은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어둡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이놈’을 거두들이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있는데 무심(無心)으로 돌아가는 게 안 돼서 우리는 생멸생사(生滅生死)를 합니다. 일어나는 마음만 있고, 돌아서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비춰봐야 하는 데 이러한 ‘비춤’을 하지 못합니다. 바로 끊을 줄 아는 직절(直切)이 없습니다.
번뇌도 자성번뇌입니다. 번뇌가 본래 뿌리가 있어서 제 스스로 자라나는 게 아니고, 번뇌 망상 분별도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조작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자오(自悟), 스스로 깨달으면 자성번뇌는 사라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生)도 원래는 무생(無生)입니다. 생이란 육식으로 느끼면서 세상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연기성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니 본래는 무생(無生), 생겨남이 없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혹에서 벗어나면 여러분이 있는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가 2500여 년 전 석가모니부처님이 법문하던 영산회상의 자리이고, 부처님과 나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다른 뜻이 없고 다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 목적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건 육근 육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바깥의 경계를 단박에 잘라버리는 것이 불립문자입니다.
눈은 색을, 귀는 소리는 필연적으로 쫓아다닙니다. 이와 같이 색(色)과 성(聲)을 좇는 것이 꿈의 세계입니다. 밖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단칼에 잘라버리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결국 생각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눈과 귀를 막자는 건 아닙니다. 꿈꾸는 눈을 막자는 것입니다. 미혹의 구름을 걷어버리면 우주만물 산하대지가 곧 마음이라는 이치를 깨우치게 됩니다. 눈앞에 아무리 빽빽하게 우주만물 산하대지가 들어차 있어도 그것들은 원래는 실체가 없는 환영 환상이라는 걸 깨우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고들 묻는데, 이렇게 묻는 데에 바로 답이 있습니다. 정안(淨眼)은 폭포수 물의 흐름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폭포수 물의 흐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참선이란 참으로 간단명료합니다. 도가 뭐냐 부처가 뭐냐고 물으면 선사들은 ‘삼 세 근’이란 화두를 던집니다. 이 화두는 “도와 부처가 뭐냐고 지금 묻고 있는 너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육근의 경계를 차단하는 것이 바로 은산철벽이고, 화두는 은산철벽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밖으로 돌아다니던 미아(迷兒)가 배가 고파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게 화두입니다. 신심(信心)과 의심(疑心)으로 철저하게 화두를 참구해, 자기의 성품을 봐야 합니다.24시간 털끝만큼도 자기 자신과 간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반해탈의 의미는 돌아서면 끊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품을 요달(了達)하면 미혹한 경계가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마음공부이며, 마음을 밝히는 공부인 간화선을 일념으로 몰입해 정진해야 합니다.
대호대안(大好大安), 크게 좋고 크게 편안한 상태를 원하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면 자면서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의 ‘성성(猩猩)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밖으로 마음이 내달리지 않는 것. 이것이 대호대안입니다.
산하대지 구모토각(山河大地 龜毛兎角) 즉금대중 끽반끽다(卽今大衆 喫飯喫茶)
산하대지가 거북이의 털이요 토끼의 뿔이니, 여기 모인 대중들은 밥을 잡수시고 차 한 잔 드시오.
출처: 법보신문>
“세상 핑계로 공부에 게으름 피우지 말라”
지리산 상무주암 현기 스님
2013년 04월 30일, 기자간담회서 소참법문
“진흙구덩이에서 연꽃이 핀다”
2013.04.30 17:57 입력최호승 기자
▲지리산 상무주암서 홀로 30여년 간 수행정진하고 있는 현기 스님. 좀처럼 세상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리산 상무주암서 30여년 간 반야봉을 바라보며 화두를 들었다. 밤엔 별과 달을 벗 삼았고, 낮엔 끊임없이 일했다. 새벽 2시40분이면 어김없이 새벽예불을 올렸다. 예불 뒤엔 텃밭서 거둔 채소로 찬으로 끓인 쌀로 죽을 만들어 공양했다.
상무주암서 홀로 정진하던 현기 스님이4월30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 법좌에 올라 법을 설했다. 한국불교의 간화선 중흥을 위해 전국선원수좌회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현기 스님은 선원수좌회가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복잡한 세상 탓으로 본래 청정한 마음 찾기를 게을리 하는 대중들을 경책했다.
“세상 탓 말고 정진하라”는 일침이었다. “이 세상은 진흙구덩이입니다. 온갖 번뇌 망상 분별심이 모두 이곳에 있지요. 예토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곳 여기에서 연꽃이 핀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문제 돼서 공부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이런 세상이 있기에 발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거지요. 예토가 바로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는 근본입니다.”
현기 스님은 ‘화엄경’ 이야기를 꺼냈다. 번뇌 망상 분별심이 사라진 지극한 마음을 강조했다. 스님은 “화엄경의 알맹이는 발심(發心)이며, 발심은 지극한 일념”이라며 “일념으로 삼매에 들면 시공간 개념이 사라진다. 허나 일념에서 한 생각 나오면 번뇌 망상 분별이 생긴다”고 했다. 때문에 한 생각에 미혹하면 자신의 본래 자리를 망각한다는 가르침이었다.
“한 생각에 미혹되면 물에 비친 달의 그림자를 긷는 것처럼 본래 성품을 찾기 어렵습니다. 청정한 마음이 자성(自性)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 그 경계에서는 푸른 산(靑山)과 흰 구름(白雲)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붙어있지도 않은 자리를 곧바로 봐야 하지요. 머무르는 바 없는 그 마음(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바로 자성불입니다.”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현기 스님은 1970년대 송광사, 칠불암, 극락암 등에서 정진했다. 이후 지리산 반야봉이 좋아 상무주암서 반평생을 일일부작 일일불식해왔다. 현기 스님은 혜암 스님과 한철을 보내다 반야봉을 만났고 모가 나지 않고 치우침 없는 반야봉에 반했다. 그래서 반야봉을 마주 보는 상무주암에 화두를 부려놓고 낮이든 밤이든 성성하게 화두를 들고 있다.
낮이면 반야봉을 바라보고 화두를 들었다. 해가 잠든 밤이면 불 꺼진 지리산 상무주암 마당에서 포행했다. 별과 달, 바람을 벗 삼아 포행하면 “막혔던 부처님 법문이 뚫린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현기 스님은 스스로의 수행일상을 “부끄럽다”고 했다. 일대사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생의 마지막 ‘할 일’을 못 마쳤으니 더욱 철저하게 정진하겠다는 뉘우침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현기 스님은 한 마디로 잘라 답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순간 일념이 만년(一念萬年)을 갑니다.”
최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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