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네 가지 삶 / 법상 스님
나는 늘 네 가지 삶을 꿈꾸고 산다. 내가 願을 세우고 實踐하고자 노력하는 삶, 그 삶은 바로
‘깨어 있는 삶’, ‘조화로운 삶’, ‘소박한 삶’ 그리고 ‘나누는 삶’이다. 난 이 네 가지 삶이 내 안에
깊이 波濤쳐 들어와 細胞가되고 骨髓가 되며 우뚝 선 精神이 되기를 늘 誓願하고 있다.
먼저 ‘깨어 있는 삶’이란,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지관(止觀)과 정혜(定慧), 卽
마음을 비우고 알아차리는, 執着을 버리고 비추어 보는 두 가지 수행을 말한다. 깨어 있으려면
마음에 煩惱와 執着, 慾心과 바람을 먼저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마음에 온갖 煩惱를 비우고자
한다면 있는 그대로 잘 지켜보면 된다. 煩惱며 慾心, 執着이며 바람들을 있는 그대로 잘 지켜보면,
그것들을 애써 비우고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것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깨어
있는 삶이 重要하다. 每瞬間 깨어 있으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자족(自足)과 平和를 얻게
되며 나아가 智慧(깨달음)를 證得하게 된다.
두 번째 내가 꿈꾸는 삶은 바로 ‘調和로운 삶’이다. 大自然과의 共存과 共生하는 삶, 生命 있고 없는
모든 것들과의 調和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 卽 大自然이라는 비로자나 진법신(眞法身)과 調和를
이루며 사는 삶이다.
산과 들, 나무와 들풀, 계곡과 숲, 돌과 바람,그리고 모든 짐승과 곤충들을 비롯한 모든 大自然 식구들과
둘로 나뉘지 않으며 서로 調和를 이루고 共存하며 살아가는 삶, 그 삶이야말로 이 世上에서 모든 사람,
모든 生命이 持續 可能한 平和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삶이다. 大自然에 마음을 두게 되면 欲望과
利己는 저절로 消滅된다.
세 번째는 ‘소박한 삶’이다. 소박한 삶은 淸貧, 가난, 自足, 절약의 精神과도 맞닿아 있다. 스스로 滿足하며,
節制와 절약을 지키며, 最少限의 必要에 따른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삶이야말로 人間의
精神을 가장 高貴하게 일깨워주며 속 뜰의 本來 香氣를 환히 밝혀주는삶의 본보기다. 요즘같이 淸貧의
精神이 고갈되어 있는 이 때에 스스로 가난을 選擇할 수 있는 勇氣와 智慧야말로 가장 所重한 德目이다.
네 번째는 ‘나누는 삶’이다. 스스로 아무리 幸福하고 滿足한들 이웃의 不幸과 가난, 기아와 질병 등을
外面하고 放置한다면 그것은 眞正한 健康한 富有함도, 참된 幸福도 아니다. 내가 幸福하게 밥을 먹고
工夫하고 있는 이 瞬間에도 이 世上 다른 곳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헐벗어 굶주리며 죽어
가고 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그 깨달은 지혜가 世上으로 회향(回向)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은 참된
智慧가 아니다. 참된 智慧, 참된 깨달음은 이 世上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기에 내 것과 네 것 이라는
분별과 差別이 없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慈悲精神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同體에서 나오는
大慈大悲의 精神이야말로 나 自身과 이웃, 이 온세계를 밝히는 智慧와 慈悲의 根本精神이자 實踐 行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삶의 모습, 나는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설렌다. 물론 아직 그런 삶과 일치
하지 못한 삶을 사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내 삶에 指針이 되는 이 길이 있기에 늘 幸福
하다. 이따금 이 네 가지 삶의 모습에 나 自身을 비추어 보며 내 삶이 올바로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
하곤 한다. 때때로 바쁜 삶의 발길을 멈추고 自身을 점검해 보자. 나는 과연 얼마나 깨어있는 삶, 조화로운
삶, 소박한 삶,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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