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의 핵심 가르침 | 선어록과 마음공부 / 법상스님
마음을 떠나 부처는 없고, 마음 밖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찾을 수는 없다. 법(法)은 곧 마음(心)이다. 마음이 곧 깨달음이고, 부처이고, 보리이고, 열반이고, 해탈이고, 도(道)고, 선(禪)이고, 불성이고, 본성이고 하니 허망하게 마음 바깥에서 이같은 이름들을 찾지 말라.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거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거, 소리를 듣는 거, 냄새를 맡는 거, 맛을 보는 거, 생각을 하는 거, 그 전부가 다 나의 신령스런 본성이다. 본성(本性)이 곧 마음(心)이고, 마음이 곧 부처(佛)고, 부처가 곧 도(道)요, 도가 곧 선(禪)이고, 선(禪)이 곧 법(法)이고, 법이 곧 진리(眞理)이고, 진리가 곧 깨달음이다. 다시 말해 본성=마음=부처=도=선=법=진리=깨달음이다
그러니 누가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성, 마음을 보아야 하나니, 본성,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본래부터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늘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사람들 스스로가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선(善)을 생각하면 그 선한 생각은 선업(善業)이요 악(惡)을 생각하면 그 악한 생각을 일으킨 것은 악업(惡業))이니, 생각 하나에 천상세계 생기고 생각 하나에 지옥세계가 생긴다.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선업이나 악업도 모두 없어져서 천상세계 지옥세계라는 분별심(分別心)도 자연히 없어진다. 천상세계나 지옥세계의 본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천상 지옥에 집착하는 범부에게는 천상과 지옥이 있고 천상과 지옥이라는 분별에 집착하지 않는 성인에게는 천상 지옥이 없다.
어리석은 이는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으려 하지만 번뇌를 끊으려는 집착심 때문에 오히려 열반을 얻지 못한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번뇌가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번뇌를 끊겠다는 생각조차 놓아버려 항상 열반에 머문다. 만약 열반을 얻으려는 사람이 삶과 죽음이 다르다고 보고, 번뇌를 열반과 다르다고 본다면 그는 분별심에 빠지고 만 것이다. 번뇌를 열반과 다르다고 보지 않아야 열반에 들 수 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죽음과 삶이라는 분별심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생 동안 쌓아온 업장이라도 다 소멸할 수 있다. 일생 동안 수행했을지라도 임종할 때에 이르러 죽음과 삶이라는 분별심에 집착하면 그 사람의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분별심, 집착심)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마음의 본래 성품을 깨달으면 다시 분별 망상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눈으로 사물을 보되 사물을 보는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되 소리를 듣는 마음이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코로 냄새를 맡되 냄새를 맡는 마음이 냄새에 집착하지 않고, 혀로 맛을 보되 맛을 보는 마음이 맛에 집착하지 않고, 피부로 감촉을 느끼되 감촉을 느끼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서 생각을 하되 생각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 자유인이다.
눈을 통해 본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눈이 선(禪=법=진리=도=마음=부처=깨달음=진리=보리=본성에 들어가는 문이 되고, 귀를 통해 들은 소리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귀가 선(禪)에 들어가는 문이 된다. 코, 혀, 피부, 마음도 마찬가지다.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는 사람은 그의 보는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여 구속당하지만, 사물의 무상(無常)한 성품을 깨달아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보는 그 사람의 마음은 사물에 구속당하지 않아 언제나 자유롭다.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않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자유로움인 것이다.
[달마어록] 중에서
✔ 기존 경전에서 ‘여래장’, '여래', ‘불성’, ‘열반’, ‘반야’, ‘진여’, ‘본각’, ‘일불승’, ‘원각’, ‘일심’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禪)에서는 주로 ‘마음’, 혹은 ‘법’ 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을 외부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이것'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과 나는 분리되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이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렇게 우리가 생생하게 쓰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일러 ‘마음’=법=선=도=부처=진리=깨달음=일심=원각=일승=여래=여래장=불성=열반=진여=반야라는 방편(方便)을 사용해서 '이것'을 드러내보인 것이다.
마음이 곧 깨달음이니,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마음이며, 본성인가? 일체시 일체처에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눈썹 찡그리고 눈 깜빡이고 손발 움직이는 것이 전부 자기의 신령스런 본성이며 마음이고 도고 선이고 부처다.
마음은 본래 이처럼 늘 눈앞(目前)에 드러나 있지만 중생 스스로가 마음을 보지 못할 뿐이다.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켜 대상을 있다고 여겨 환상인 대상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천상도 있고 지옥도 있고 온갖 고통만이 보이지만, 분별심과 환상인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 선과 악, 지옥과 천상이라는 분별이 다 사라지고 없다. 텅~비어 온 우주에 충만하여 확~트여 막힘이 없는 확연한 본래 성품만이 영원히 늘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헛된 분별 망상 번뇌는 실체가 있는 실제가 아니라, 다만 중생이 허망하게 조작해낸 허깨비일 뿐이다. 그러니 분별 망상 번뇌를 끊어버리려는 생각조차 또 다른 분별 망상 번뇌일 뿐이다. 그 어떤 생각을 하나라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은 전부 다 분별 망상 번뇌일 뿐이다.
‘이 자리’, '이것', ‘마음’, ‘법’은 텅~비어 확연하여 부처, 열반이라는 이름도 붙을 자리가 없다. 성스럽다는 것조차 무언가가가 있다는 뜻이니 성스러운 그런 것조차 없다.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다. 텅~비고 막힌 데가 없이 확 틔여서 성스러움 조차 없다. 겉으로는 번뇌가 있고 분별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본성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텅 비어서 열반과 번뇌가 다르지 않다. 전혀 둘로 나뉘는 것이 없다.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다.
이 본래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면 죽음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업장도 헛된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고 깨닫고 나면, 본성을 확인하고 나면, 마음을 확인하고 나면 공한 것을 깨달으니, 삶이 의미가 없거나, 보고 듣고 맛보지도 못하고, 직장 생활도 못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눈을 통해 볼 것은 똑같이 다 보지만 보는 것에 보는 마음이 집착하지만 않는 것이다.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들리는 소리에 듣는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눈귀코혀몸뜻이 전부 선(禪)으로 들어가는 문(門)이 된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행동고 생각하며 남들이 하는 바 그대로 똑같이 다 행위하지만, 행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기에 전부 다 행위하지만 행위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머무는 바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사물의 무상한 성품을 깨달아 사물을 잘 쓰면서도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깨달았다고 돈을 안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열심히 벌면서도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니 돈을 많이 벌어도 그뿐이고 못 벌어도 그뿐이다. 돈벌이를 즐겁게 하면서도 돈벌이에 얽매임이 없다. 그러니 집착이 없고 자유롭게 한 생을 여행하듯, 놀이하듯 살아가게 된다. 대자유인으로산다. 겉으로 보기엔 남들과 똑같은 듯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대자유를 증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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