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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부처다>

장백산-1 2019. 1. 19. 17:51

<내가 바로 부처다>


오늘은 선어록과 마음공부 242쪽 임제의현(臨濟義玄), 임제어록(臨濟語錄)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유명한 임제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것에 있다. 만약 그대들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곧 허둥대며, 모든 현상(대상, 경계)를 따라 얽매이고, 온갖 경계에 끄달려서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매 순간순간 밖으로 내달려 진리를 추구하는 분별하는 마음만 쉴 수 있다면 그즉시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부처나 조사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은 다만 지금 여기 눈앞에서 진리를 청해 듣기만 하라.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곧장 밖으로 내달려 진리를 추구하지만, 설사 진리를 구하여 얻는다 할지라도 그 진리는 모두가 다 문자로 된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고,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니, 살아 활발발한 부처의 뜻 조사의 뜻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2,243)


사람들이 불법을, 불법의 요지, 즉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는 원인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바로 부처다.”라고 “지금 여기 이대로, 이 순간 이 자리 이대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바로 부처다.”라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내가 바로 부처, 진리다 '라는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전혀 믿지 않고, 여기 있는 부처를 놔두고 바깥으로 다른 곳으로 가서 부처를 찾으려고 애쓰고 부처를 구하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밖으로만 내달려 부처를 추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는 것이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는 원인이자 병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바로 부처다’ 라는 사실을 스스로 굳게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허둥대면서 바깥을 향해 진리를 구하거나 경계에 따라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부처인 나, 진리인 나 밖으로 내달려서 진리를 추구하는 부녈하는 마음만 쉴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부처와 조사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내가 밖을 향해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냥 마음을 텅~비우고 고요히 있으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그냥 이렇게 있으면, 나도 그건 할 줄 아는데, 그걸 해봐도 부처가 안 되던데요. 이렇게 얘기를 해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고요하게 아무리 생각을 안 하고 분별 망상을 하지 않고 잠시 있어도 나는 전혀 부처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부처라는 걸 믿을 수 있겠느냐?”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는 원인이 뭐냐면 부처, 진리에 대한 상(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는 진리는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뭔가 일거 같고, 신통자재한 뭔가 일거 같은 상(相, 관념, 개념, 이미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 부처라는 말은, 뒤에 임제 스님이 하신 말이 나오는데, 틱낫한 스님도 그 비유를 자주 드는데, 그 비유는 ‘물 위를 걷는 것이 신통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 큰 신통이다’ 라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세상 모든 것이 갑자기 부처로 보이고, 너무나도 금은보화처럼 보이고, 뭐 불국정토로 보이지만, 이런 것이 부처가 아니고. 또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마음도 다 읽을 수 있고, 그 사람의 전생도 환히 볼 수 있고, 인과에 어떻게 얽매어 있는지도 다 볼 수 있고, 뭐 이런 신통자재함 뭐 이런 것이 부처일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내 머릿속에서 그런 어떤 부처에 대한 상(相), 깨달음에 대한 모양(相)을 만들어놓다 보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아무 문제가 없어도 ‘나는 부처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는 것이지요. 


참된 명상이랄까요? 참된 선, 참된 마음공부는 보통 이제 사람들이 명상이 뭐냐? 이렇게 물어보면 명상은 되게 단순한 것이지요. 마음공부는 앉아서 생각이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히고 있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원광사에 오시는데 날씨가 참 좋잖아요. 날씨가 산산하고 햇살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머리 위로 내리쬐고, 몸에 느껴지는 그 어떤 감각 그런 것들을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있는 그대로 느껴주고, 그냥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만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면서 이게 옳으니 제게 옳으니, 이게 맞니 저게 맞니, 다음에는 뭘 해야 되고, 내일은 뭘 해야 되고, 돈은 어떻게 벌어야 되고. 이런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고 분별하는 그 어떤 생각도 개입시키지 않고, 부족하다거나 넘쳐난다거나 그런 분별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그냥 단순하게 존재하고 있을 때, 그것이 가장 위대한 명상이고, 그게 마음공부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너무 맹숭맹숭 해서 ‘그걸 어떻게 도(道), 진리, 깨달음, 부처, 본래의 나라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그 생각이 도, 진리, 깨달음, 부처, 본래의 나를 터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원인인 것이지요.


사람들의 분별하는 생각이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고 신통방통한 무언가가 도, 진리, 깨달음, 부처, 본래의 나일 것이라는 환상을 좇고 있으니까 그와 같은 분별하는 생각, 환상을 쉬기 전까지는 이 평범한, 단순한, 매 순간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를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아무 일 없음의 자유, 텅~빈 일 없음의 자유, 그런 것을 느끼고 누렸으면서도 전혀 ‘그것은 부처가 아니다’라고,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부처를 찾아야 한다’ 하고 바깥으로 허망하게 쫓아다니는 것이지요.


-법상스님- 법문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