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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진리다>

장백산-1 2019. 1. 19. 18:29

<내가 바로 진리다>


그래서 "조사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은 이 부처와 조사를 알고자 한다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만 그대들은 지금 여기 눈앞에서 법을 청해 듣기만 하라’" 이렇게 나오잖아요.


깨달음, 진리, 부처, 조사, 도, 법을 터득하고자 하면 뭐 선(禪)에서는 ‘육도만행’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뭐 끊임없이 육바라밀을 닦아가고, 끊임없이 온갖 실천행을 닦아가고, 끊이없이 수행을 해나가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선(禪)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이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이렇게 지금 여기 눈앞에서 법을 청해 듣기만 하는 겁니다. 법을 청해 들음으로서 법과 내가 가까이할 수 있게 되고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들음으로써 뭐랄까, 이렇게 저절로 법과 함께 공명(共鳴)하게 되고, 법(法), 진리, 도, 부처, 깨달음, 이 진리를 그냥 이렇게 들음으로써 저절로 내 안에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분별 망상들 ‘진리는 이런 걸 거야’라고 생각하던 진리, 도, 부처, 깨달음에 대한 그런 삿된 생각들, 이런 것들이 그냥 저절로 쉬어지게 됩니다. 저절로 단순해지게 됩니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이 그냥 아카데미 강의만 들었을 뿐인데, 어쩌면 어떤 분들은 전에는 막 백일기도를 계속해야 할 것 같고, 절을 매일같이 안 하면 안 되는 거 같고, 염불하고 수행하고 뭐 하고 뭐하고 계속 뭔가를 해야만 할 거 같은 어떤 압박감에 혹시나 시달린 분들이 계셨다면, ‘아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라는 어떤 자유함을 느끼게 됐을 수도 있어요. 혹은 깨달음에 대한 어마어마한 상(相)을 가지고 있던 분이라면 ‘아 깨다름, 진리, 도, 부처는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법을 청해 듣는 겁니다. 그리고 법이 담겨있는 경전을 가까이하고 또 법문을 가까이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마음공부에서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무엇을 공부로 삼았느냐면 선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그걸 찾는데 오랜 세월을 보내고 그래서 어디 어디 가면 선지식이 있다더라. 그 소식을 듣는 데만 몇 년을 허비하다가 그 소식을 듣고 나면 이제 그때부터 걸망 싸서 찾아가기 시작하는 거지요. 찾아가도 중국이나 인도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으니 몇 달에 걸쳐서 찾아가면, 거기서 따로 하는 게 없어요. 그냥 거기서 같이 사는 겁니다. 그냥 걸망 풀고 거기서 그냥 계속 법문을 청해 듣는 겁니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 같으면 집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인터넷으로도 들을 수 있는데. 그 당시는 그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옆에 있으면서 계속 법문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옛날에 또 선사 스님들은 그렇게 자상하게 법문을 설해주기도 하고 뭐 그러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제자들은 그 법을 얻으려고 거기서 1년, 2년, 3년을 있는데도 한 마디 이야기를 안 해줘서 삐져가지고 막 그냥 떠나려고도 하고 떠나가기도 합니다.


떠나려는데 선사 스님이 “왜 가려고 하느냐?”하니까  “아니 내가 법을 깨달으려고 왔지.” “제가 스님 뭐 따까리 하러 왔습니까.” “저는 법도 하나 안 가르쳐주는 스님 밑에 안 있으렵니다.” 이러고 가면, “어디 가는데.” “저는 이제 법을 찾아갑니다.” “야 법은 뭘 찾아가느냐.” “여기에도 법(法)있다.” “여기 어디에 법이 있습니까?” “여기서 네가 밥을 해주면 내가 같이 먹은 게 그게 법이고, 네가 말을 하면 이야기도 들어 준 그것이 법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계시고. 


혹은 떠나가는 제자가 한참 가는데 뒤통수에다 대고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데 “도(禪)나 가져가라.” 하는 그런 일화들을 보면 그야말로 스님들이 하루하루 사는 모습 그 자체가 그대로 선(禪), 법(法), 도(道), 부처(佛), 마음(心), 깨달음이었는데. 우리는 살면서 온갖 생각, 분별 망상, 고민, 근심을 다 부여안고 살잖아요. 그것이 진리, 부처, 선, 법, 도, 깨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거지요. 그냥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이, 그것이 그대로 선(禪)인데 선, 법, 도, 부처, 진리,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삶으로써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일반 중생들은 뭐 이렇게 깨닫고 이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법문을 청해 듣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법을 청해 많이 듣는 것, 그런 것이 사실은 마음공부이지. 법이 없던 시절일수록 수행이 유행하던 시대로 바뀝니다. 그리고 법이 오롯이 살아있던 시대는 수행이 필요가 없었지요. 그냥 그저 법과 하나 되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지요.


배우는 사람이 내가 바로 부처라는 믿음이 부족하면 곧장 밖으로 내달려서 부처를 구하는, 밖으로 치달려 진리를 구하기만 하는데 설사 그렇게 해서 부처를 구하여 얻는다 할지라도 그런 선, 부처, 진리, 도, 깨달음, 법은 모두 문자로 된 텅~빈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고 상(相), 개념일 뿐이니, 살아있는 활발발한 부처 조사의 뜻을 얻지는 못한다.


말로 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문자고  상(相)이고 개념이라는 방편(方便)일 뿐이지요. 방편에 사로잡히게 되면 법(法), 진리, 부처, 깨달음, 도(道), 본래의 나, 선(禪)의 바른 참뜻, 종지(宗旨)를 터득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법상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