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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만물이 본래 이미 이대로 완전한 부처다>

장백산-1 2019. 1. 19. 23:12

<우주만물이 본래 이미 이대로 완전한 부처다>


"그러면 무엇이 법을 말할 줄 알거나 법을 들을 줄 아는가? 바로 그대들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 하나가 홀로 고요하고 고고하게 밝으니 이 하나가 법을 들을 줄도 알고 법을 말할 줄도 아는 그것이다."


여기 글에서는 눈앞, 목전(目前)이라는 표현을 쓰다 보니까 목전에서 눈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 하나가 홀로 고요하고 밝다. 하나가 홀로 고고하게 밝다 라는 이런 표현을 쓴 거예요. 그러나 이 말 이것도 문자로 된 어떤 개념이니까 이 문자로 된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있다 없다,라고 우리가 분별하는 생각, 개념 이런 것으로는 규정할 수 없고 정의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무엇이다’라는 그것을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사람들은 단어나 개념이나 말이 나오면, 머릿속으로 그 말 개념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분별을 하는 생각으로 개념을 만듭니다. 개념 관념을 상(相)이라고 그래요. 이미지를 그려요. A라는 얘기를 하면 A라는 얘기는 어떤 거지? 하고 분별하는 생각으로 이미지 그림을 그립니다. 개념 관념 이미지 그림 그걸 상(相)이라고 그래요 금강경에서.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는 그대 눈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 하나가 홀로 고요하고 고고하게 밝다고 말하면 ‘야 이게 눈앞에서 또렷하게 역력한 것 하나가 홀로 고요하고 고고하게 밝은 게 그것이 도대체 뭐지’ 하는 그 생각 마음이 분별심(分別心)이거든요. 그게 ‘뭐지’ 하고 머리로 개념을 만들고 싶은 분별하는 생각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선(禪) 공부, 마음공부는 분별심을 내서는 안 되는 공부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이 말에는 관심이 없어야 돼요. 이 말은 그냥 뭔지 모를 ‘모를 뿐’인 뭔지 모를 이것을, 이 자리를,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들으면 ‘아아 눈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이 하나 홀로 고고하게 밝은 거’ ‘오케이 알았다 그게 불성이구나’ ‘본래면목이구나’ ‘자성이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 이것 하나를 규정짓고 정의 내리면 안 된다는 것이니다. 이런 얘기가 들리면 딱 ‘모를 뿐’ 모르겠구나. 이것은 의식으로 아는 뭔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듣고 이것을 알려고 애쓰고 의식을 가지고 애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수행을 통해서 ‘그걸 찾아야지’ 하고 애쓰면, 그것은 오히려 이것과 벌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를 했을 때 ‘야 눈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 하나가 홀로 고요하고 고고하게 밝으니 이것 하나가 법을 들을 줄도 알고 법을 말할 줄도 안다’ ‘야 나도 알 수 없는 뭔가가 하여간 있다는 얘기 같은데’ 하고 그냥 나도 모르게 그냥 답답한 마음이 든단 말이에요.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이걸 확인하고 싶은데 확인하려고 하면 이것과 어긋난다고 하고 이것을 확인하려고 애쓰면 애쓰는 거 자체가 유위법(有爲法 : 의식적으로 조작해 내는 것, 法)이라서 뭔가를 자꾸 의도하게 되고 이것을 찾으려는 마음은 이것과 점점 어긋난다


이것을 찾으려면 바깥을 향해 이것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모르겠음’ '오직 모를 뿐' 이게 마음공부의 다입니다. 답답함. 모르니까 답답한 마음, 꽉 막힌 마음 생각 이게 화두(話頭)이고 선(禪)입니다. 그래서 그런 답답한 마음으로 그냥 꽉 막히면 그뿐이지. 이걸 찾으려고 애쓰거나 이럴 필요는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래서 단지 이것만 볼 수 있으면 바로 부처와 조사와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거지요.


이것을 확인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법(法), 진리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제가 자주 비유를 드는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의 비유처럼. 뭐 에로 영화, 멜로 영화, 공포 영화 등 모든 영화를 몇 시간 동안 재밌게 보고 그 영화 속 주인공에게 감정이입 몰입도 되고 웃고 눈물도 흘리고 그렇게 했지만, 사실 우리는 몇 시간 내내 그 스크린 하나만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영화 스크린 위에 비춰진 실체가 없는 허망한 빛의 그림자가 빨간 빛, 하얀 빛, 노란 빛, 다양한 빛이 요렇게 조합이 되면 ‘야 주인공이 예쁘다’ 그러고. 또 요렇게 조합이 되면 ‘야 뭐 험악하다’ 뭐 이런 다양한 상(相)을 그려내면서 그 상(相)의 내용에 푹~빠져가지고 울고 웃고 하면서 많은 생각을 일으켰지만, 사실 우리는 그 몇 시간 내내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텅~빈 스크린, 텅~비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영상이 드러나도록 하는 스크린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알록달록한 스크린에는 영상을 비춰봐야 영상이 선명하게 제대로 보이지 않잖아요. 하얗고 깨끗한 텅~비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스크린이다 보니까 거기에 비춰주는 영상 그대로 거기에 빠져 들어간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몇 시간 동안 무엇을 봤어요?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영화의 스크린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크린에는 관심이 없고 스크린 위에 비춰지는 영화의 영상 내용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기에 스크린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거지요.


우리가 이 세상 만물을 보고 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상만사를 보면서 살지만,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좋아서 웃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싫어서 인상을 찡그리면서 살고 그러지만, 사실은 보이는 모든 존재가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었고 영화의 스크린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냥 다 부처였다는 것이지요. 하나의 부처. 마치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서도 본바탕인 스크린을 보지 않고 스크린 위에 비춰지는  영화의 영상 내용에만 빠져들어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이 온갖 소리를 듣지만 사실은 모든 소리가 그대로 다 하나의 부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인데, 우리는 소리하는 내용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지요. 사실은 소리나 영상이나 내용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냥 스크린 위에 드러난 빛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빛이 요렇게 조합이 되면 ‘주인공이 예쁘다’ 요렇게 조합이 되면 ‘안 예쁘다’라고 분별을 하는데. 그게 어찌 보면은 사람 눈이 요렇게 돼있으면 ‘예쁘다’ 하는데, 두 눈 중 눈 하나만 이렇게 다른 한 쪽 눈 보다 위로 올라가 있어도 안 예쁘다 하고 장애인이라고 이러잖아요. 그게 어찌 보면 그냥 아주 단순한 건데, 내 머릿속으로 내가 개념을 지어서 요런 건 예쁘고 저건 안 예쁘고 뭐 이런 식으로 개념을 짓고 따라가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삶도 똑같다는 것이지요. 내 인생에 드러나는 모든 일들, 모든 사건들, 모든 사람들, 내가 듣고 있는 모든 말들, 이 모든 것들, 제법(諸法), 우주삼라만상만물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개념도 없고 실체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한 편의 영화 스토리가 스크린 위에 지나가는 것처럼, 삶이라는 스토리가 내 눈앞 내 목전에서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다 목전에서 스쳐 지나갑니다 그냥. 나는 단지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잠시 경험하는 존재, 눈앞을 잠깐 스쳐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왔다가 지나가는 것이지요. 마치 스크린이라는 하얀 배경 위로 온갖 다양한 영상이 스쳐지나가듯이.


하얀 스크린 위로 폭력 영상이 지나갔다고 해서 스크린이 폭력에 물들지는 않거든요. 폭력에 오염되지는 않거든요. 아름다운 영화가 지나갔다고 해서 스크린이 더 행복해하거나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에서 좀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몇 날 몇 칠을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스크린이 나인 줄 모르고 배경이 나인 줄 모르고 스크린 배경 텅~빈 바탕 위에 등장했다 스쳐지나가는 영상이 나인 줄 아는 거예요. 내 눈앞에 드러나는 모든 것이 다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실체가 없는 것들이잖아요.


여러분 조부모, 부모, 자식, 손자손녀도 다 내 눈앞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영상과 같은 것입니다. 영화속 영상과 같은 그들은 전부 내 눈앞에서 내 목전에서 한 100년, 한 60년, 50년쯤 동안 등장했다가 퇴장하겠지요. 어떤 낯선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앞에 등장해서 내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그 남자에게 입혀놓고, 내 남편이라는 개념을 입혀서, 내 인생에 심대한 비중을 두고 등장시켜놨다가 한 50년쯤 지나고 나면 또 자동으로 내가 퇴장하듯이 그 사람도 인생의 목전에서 퇴장을 한단 말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등장했다 퇴장할 사람들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눈앞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영화 스크린처럼 내 눈앞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겁니다 . 그런데 사람들은 눈앞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것들 중에 특별한 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쥐었을 때 괴로움이 생기지요. 눈앞에서 수많은 소리가 드러났다가 사라지지요. 소리라는 것도 단순히 영화 스크린과 같은 내 존재위에 그냥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치 새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지요.


새소리도 들렸다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모든 소리는 눈앞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거지요. 그런데 수많은 소리 중에 특정한 소리를 탁 쥐어서 괴로워하면, ‘야 그 소리가 나를 공격했어’ 그 소리 때문에 내가 죽을 거 같아 하면 되게 어이없는 허망한 일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고 살지요. 남들이 나한테 ‘야 너 능력도 없고 너 같은 놈이 밥 먹고사는 게 뭐 어떻다’ 하면서 욕을 했어요. 그런데 그 욕은 욕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소리가 새소리가 지나가듯이, TV를 켜면 밀림에서 사자가 한번 울듯이, 다양한 소리 중에 하나의 소리가 내 눈앞에 등장했다 퇴장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저놈이 나를 이렇게 미워했었나?” 하면서 원한심을 갖습니다. 말 한 마디에 원한심을 느껴서 10년, 20년, 30년 동안 그 원한심이 내 안에 사로잡혀 있다가 ‘언젠간 복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고, 그 한 마디 들은 게 억울해서 평생을 복수의 칼을 갈다가 몇 십 년 만에 가서 복수를 한단 말이지요. 이게 얼마나 허망한 일이에요. 영화 속 스토리에 스스로 빠져 들어서 개입해서 그게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우리는 영화 스토리에 휘둘릴 수도 있고 휘둘리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내가 스스로 영화 스토리에 휘둘리는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지요. 그것을 선택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아무 일 없는 영화 스크린처럼 영화 내용이 스크린 위에 등장하고 퇴장하더라도 스크린이 나의 본체, 본바탕이니까 나는 전혀 물들수가 없는 그냥 목전에서 그걸 지켜보는 존재이거든요. ‘어떻게 내가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욕도 그냥 하나의 소리일 뿐이니까. 내 눈 앞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소리,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이와 똑같다는 것이지요.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특정한 것을 요만큼은 내 거라고 집착하고 또 요거는 싫다,라고 해서 미워하고, 그러면서 삶을 만들어냅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 제각기 각자 자기의 개별적인 삶을 만들어냅니다. 그건 100%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우주입니다, 자기 우주. 내가 내 인생의 창조주라고 하는 말은, 신이 인생을 일괄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창조해놓은 거라는 말입니다. 그냥 아무 일 없는 영화 스크린처럼 영화 영상 내용이 스크린 위를 오고 가더라도 스크린이 우리의 본체니까 우리는 전혀 영상 내용에 오염될 수가 없는 그냥 목전에서 영상 내용을 지켜보는 존재이거든요. 우리는 영화의 영상 내용을 지켜보는 하나의 스크린과 같은 부처입니다, 전혀 영상 내용에 오염됨 없이. 그런데 이 스크린이 갑자기 영화 속에 등장한 내용물을 가지고 좋다 싫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해서 그 해석 분별에 허망하게 사로잡혀서 집착해서 혼자 가슴앓이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상황이 괴롭다고 내가 반드시 괴로운 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자기 동일시하고 어떻게 내가 그 상황 속에 깊이 개입되고 이걸 진짜라고 느끼고 진짜라고 믿으면서 내가 이 괴로운 상황 속에 빠져있는 당사자라고 느끼면서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고 하는 것은 그건 다 자기의식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허망한 환상(幻想)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있는 동시에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냥 등장했다 퇴장하는 것들만 있을 뿐입니다.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들이야 뭐 등장했다가 퇴장하면 그뿐이지 거기에 내가 깊이 개입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동일시(同一視)가 너무 강해서 내 눈앞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사건들, 사물들, 감정들 이것이 나라고 느끼는 자기 동일시가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 동일시에서 전혀 빠져나올 수 없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겁니다. 


마음공부는 뭐냐 하면 내가 지금까지 이 모든 게 진짜라고 여겼던 것들, 그래서 좋아하는 건 더 집착하고 싫은 건 더 멀리 밀쳐내야 된다고 굳게 믿으면서 평생을 두고 하던 집착과 거부의 개념놀이에서 깨어나는 거 그거 하나입니다. 허망한 영화 속 스크린이 지가 스크린인 줄 모르고 그 스크린 위에 잠깐 드러나고 사라지는 그 빛의 모습, 그림자를 스크린 나라고 동일시하는 겁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나라고 생각하고 주인공이 나올 때는 스크린이 막 좋아했다가 악당이 나오면 갑자기 막 괴로워했다가 그게 진짜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라는 스크린이 환상, 망상 피운 거지. 그러니까 스크린은 그렇게 망상을 피우고 있어도 이 망상이 자신을 가짜로 사로잡아서 괴롭게 만드는 것일 뿐이지.


우리는 망상을 피우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언제나 부처입니다. 언제나 하나의 바탕, 하나의 배경으로써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이 내 눈앞, 목전에서 드러나고 사라지는 것을 허용해주고 있어요. 우리가 하나의 텅~빈 허공과 같은 지금 여기서 편히 일하면 눈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해서 그래서 눈앞에 등장하는 그 하나하나에 다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다 하나의 부처, 하나의 스크린 위에 드러나고 있는 허상(虛像)입니다. 그러나 분별로 인해 하나의 스크린, 하나의 부처를 보는 지혜가 막혀 있지요, 우리들은 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서 나라는 스크린, 나라는 부처의 본체를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항상 둘로 나눕니다, 둘로 쪼개야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게 생각의 특징입니다.


분별하는 생각의 특징은 항상 둘로 쪼개야지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뭐 하나가 딱 등장하면 그게 뭔지를 분별을 하기 전에는 그게 뭔지 모르는 거예요. 아들 딸이 80점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 부모님들이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전혀 모르는 거지요. 자식 성적표 하나만 봐가지고는 높은 점수인지 낮은 점수인지 모르는 거지요. 전체 평균이 몇 점인지를 알아야 ‘아 내 자식 점수가 어느 정도구나’ 하는 비교 판단이 가능하단 말이지요.


사람들은 분별심 때문에 내 눈앞에 목전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수많은 것들을 딱 줄 세워놓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허망하고 헛된 개념놀이를 평생 동안 하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 하는 개념놀이가 눈앞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걸 가지고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고, 이 사람은 취해야 되고 저 사람은 버려야 되고, 이 소리는 듣기 좋고 저 소리는 듣기 싫고, 다 자기 생각이 만든 개념을 가지고 등장하고 퇴장하는 개념놀이를 하면서 내 눈앞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개념이라는 환상(幻想)에 가치를 매기는 개념놀이, 비교하는 개념놀이, 그런 개념놀이를 하면서 스스로 만들은 괴로움이라는 개념 환상에 스스로 빠지는 것이지요. 허망하게 온갖 종류의 괴로움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서 어처구니 없게 그 괴로움, 개념, 환상에 스스로 빠져 괴로워하는 겁니다.


"이 산승의 견처로 보자면 깊고 깊지 않은 것이 없고 해탈하지 않은 것도 없다." 깊고 깊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도 없고, 맞고 틀린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거라는 일체의 분별이 당처에는 없어요. 우리 인생은 그냥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본래 이미 이대로 완전한 부처, 도, 진리, 깨달음, 본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법상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