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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장백산-1 2019. 1. 20. 01:13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 산승의 견처에서는,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의 머리는 꺾어 버리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4)


아주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되게 황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지보살(十地菩薩)은 비천한 놈과 같고,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은 목에 칼을 차고 쇠사슬에 묶인 죄인 같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4)


등각, 묘각은 화엄경에 말하는 52계위 중에 51, 52의 계위인가 그래요. 즉 최고 단계의 깨달음 직전에 있는 깨달은 자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은 자가 목에 쇠사슬을 묶은 죄인 같고,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은 뒷간의 더러운 똥과 같고, 깨달음과 열반 또한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을 뿐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4)


그 하찮은 그냥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이런 말을 타 종교인들이 보면 ‘야 이거 기가 막힌데’ 하면서(웃음) ‘야 너희들이 믿는 그 부처라는 게 그 깨달음을 얻었던 스님들이 하는 얘기 아니냐’ ‘더러운 똥과 같다’ ‘부처라는 게 더러운 똥인데 뭐 하러 그런 부처를 믿느냐’ 이제 이런 식으로 공격할 수가 있겠지요. 이 말은 돌이켜 말하면 더러운 똥도 벽지불과 같고 당나귀를 매는 말뚝조차 깨달음이고 열반이 아닌 것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견처에서는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에요. 불이법(不二法)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둘이 아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않은 것이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다. 삶과 죽음 그게 괴로움이라고 느끼지만 생사(삶과 죽음)이 곧 열반이다. 스크린이라는 바탕이 곧 그 안의 영상 내용물과 다르지 않다. 스크린이라는 본바탕 위에 영상 내용물이 비춰지고 있는 거니까.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 소리를 하는 겁니다. 실제 부처, 진리, 법, 도, 깨달음이 똥과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똥이나 부처나 둘이 아닌 하나의 부처입니다, 하나의 부처. 하나의 스크린 위에 똥도 왔다가 가고, 더러운 것도 왔다가 가고, 좋은 것도 왔다가 가고, 나쁜 것도 왔다가 가듯이. 왔다가 가는 거는 진실하지 않습니다. 왔다가 가는 거 그 이면의 당처, 지금 여기 이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니까.


바다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물거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거품 본질의 자리, 바다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를 바다라고 한다면 수많은 똥이며 말뚝이며 이 모든 것들은 바다, 부처 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결과 같다는 것이지요. 물결이 곧 바다잖아요. 그러니까 온갖 더러운 거, 티끌, 그런 것이 바다와 다르지 않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지. 뭐 이렇게 부처, 진리, 법, 도, 깨달음, 본래의 나를 무시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불이법(不二法) 즉, 온 우주법계가 둘이 아닌 하나다,라는 진실을 설하고 있는 겁니다.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