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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눈을 찾을 수 없다>

장백산-1 2019. 1. 20. 01:39

<눈이 눈을 찾을 수 없다>


일 없는 이가 귀한 사람이니 조작하지 말고 다만 평상심을 지니라. 바깥으로 구하러 다니며 할 일을 찾는다면 오해한 것이다. 그대는 찾아다니고 있는 바로 그것을 아는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4)


일 없는 이가 귀하다. 이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모든 영상 내용들, 우리 삶 위에 등장하는 모든 영상 내용들이 진짜라고 여기니까 그것들을 좋은 거 싫은 걸로 나눠놓고 좋은 거는 가지려고 막 열심히 일을 하잖아요. 열심히 행동하잖아요. 싫은 건 버리기 위해서 막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막 열심히 뭔가 각자가 맡은 배역을 소화해야 되지만, 눈앞에서 목전에서 영화를 다 관찰하는 사람들 관람객들은 그냥 편안히 객석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그냥 보면 될 뿐이니까 할 일이 없어요. 그것처럼 일 없는 이가 귀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일은 일대로 다 하는데, 마음의 부담이 다 가라앉아 버립니다. 일은 다 하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 밥해주고, 얘 공부 잘하는지 지켜보고, 학원은 잘 가는지, 부모님은 뭐 또 잘 계시는지,


또는 옆에 친구들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남편은 뭐 일이 잘 되고 있는지, 뭐 이런 온갖 것들을 막 신경 쓰고 그래서 이게 안 되면 어쩌지. 자식이 대학교 좋은 데 못 가면 어쩌지. 애가 시험 못 보면 어쩌지. 이번에 시험 못 보면 뭐 내신 점수가 몇 점이 깎일 텐데. 그래 되면은 몇 점이 깎이면 나중에 아무리 보완을 하려고 해도 뭐 3년 평균을 잡았을 때 원하는 고등학교에 못 가고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야 그럼 지금 이번 시험이 되게 중요하네. 야, 그러면 이거 어떡하지. 뭐 과외선생이라도 따로 더 붙여가지고 이번 성적을 더 좋게 받아야 되나’ 이런 식으로 분별 망상을 하는 머리가 막 굴러가는 거예요. 아주 심플하게 그냥 걔가 그냥 시험하나 보는 거, 끝. 그런데 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하면 이게 오만가지 일이 돼서 아이를 조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생각의 더미에 빠져 있으면. “너 이번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그런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게 엄마는 예를 들어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 중요하다’ 뭐 그러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우리 초등, 중학생 애들과 얘기해보면 애들이 뭐라 그러나면요. “근데 스님 생각처럼 엄마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들이 아닙니다.”(웃음) “이분들이 진짜 중요한 것만 중요하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엄마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은 거지요. 요즘은 이제 엄마가 공부 다 한다, 이러잖아요. 엄마가 머릿속으로 무슨 학교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고 정보 싸움이니 이래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정보를 막 이렇게, 엄마는 머릿속에 계획이 다 있는 거지요. 자식은 그 계획 없어요. 그냥 지는 공부 하라니까 하고. 엄마 눈치 피해서 자꾸 게임도 하고 놀고 싶고 친구랑 뛰어놀고 싶고. 걔가 뭐 치밀하게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그 고민을 혼자 다 해주면 애는 자꾸 눈치 보면서 피할 생각만 하니까 주도적으로 공부할 마음이 없어져요. 확실합니다. 하다못해 남편들도 아내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자꾸 시키잖아요? 그러면 집에 가서 이렇게 눈치를 봐서 시킬 때까지 끝까지 버티고 TV 보고 있다가 시키면 그때 가서 이렇게 좀 도와주는 척을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아예 안 시켜버리잖아요. 아예 안 시켜버리고 아예 알아서 내버려둬 버리면 이게 내 일이 돼버리는 거지요.


부모님이 시켜서 아이 성적 올라가는 거 하고 그거는 지 머리 좋으면 시켜도 잘 하겠지만. 스스로 ‘내가 지금부터 공부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딱하는 애들은 어우, 정말 무섭게 공부를 해버립니다. 부모님이 막 제발 좀 그만 좀 하라고 말려야 될 정도로 공부를 해버려요.


어지간한 사위, 며느리는 눈에 차지도 않고. 그러고 결혼 시켜놔도 사위, 며느리가 눈에 안 차니까, 사위, 며느리하고 자꾸 싸우게 되고. 뭐 그렇게 되면은 오히려 더 사이가 안 좋아지고 그럼 뭐 평생 배신감, 자식에 대한 배신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배신감. 일 없이 살면 됩니다, 일 없이. 그냥 네 인생 네가 살아라. 내 인생 내가 산다. 자식의 인생은 스크린 위에 등장했다 퇴장하는 하나의 영화 스토리에요, 영화 스토리.


자신의 인연은 자신이 가지고 있어요. 자신의 시절인연이 있다니까요. 인연 따라 자신이 딱 공부에 꽂히는 어떤 시절 인연이 또 있고. 자신이 뭐랄까 참 삶의 그런 바가 또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제가 얘기하기가 좀 조심스러운 이유는 뭐냐면 너무 또 운명론이라고 또 한쪽으로 치우쳐 집착을 하실까 봐. 운명론에 치우칠 필요도 없고 그러나 인연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또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탁 내맡겨야 돼요, 내맡겨야 돼요. 내맡기면 저절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이 세상입니다, 


사실은. 저절로 이루어질 모든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위법(無爲法)이라 이러잖아요. 애써야지만 애쓰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애쓰지 않았을 때도 모든 것은 저절로 다 제 길 찾아가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커집니다. ‘아 어차피 맡겨버리자’ ‘부처님께 모든 걸 맡기자’ ‘내 안에 있는 본래 성품에 모든 걸 맡기자’


‘저 아이도 겉으로 봤을 땐 아이지만 하나의 부처이니, 자기 부처가 아들 부처가 알아서 자신의 인생 살겠지’ 하고 ‘그냥 믿어주자’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공부 잘하더라도 내 아들이고, 못 하더라도 내 아들이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넌 내 아들이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를 온전히 믿는다’ ‘네가 바로 부처님인데, 내가 안 믿을 수가 있겠느냐’ ‘온전히 믿어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믿음에 부응을 하거든요, 아이들은. 


그런데 내가 자꾸 뭘 시킨다는 건 널 못 믿겠다는 거거든요. ‘널 못 믿으니까 내가 시켜야 된다’ ‘너는 내가 조종해야지만 하는 놈이지’ ‘그러니까 내가 조종한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주도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방편을 쓰는 거지요. 내맡겨라. 다 인연 따라 저절로 다 살아가게 되어 있다 라는 방편을 쓰는 거지요. 그래서 ‘일 없는 이가 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말고 자식의 성적을 통제하려고 조작하지 말고, 다만 그냥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자식이 “이번 주 시험기간이에요.” “어 시험기간이구나.” “시험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보고.” 시험기간이면 있는 그대로 보면 시험기간이니까 시험 보면 되는 거예요, 그냥. 평상심으로 보면. 그런데 이제 이걸 꼬고 꼬아서 일을 만들어 내면 아까 제가 설명한 것처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니까 지금 성적 하나 떨어지면 큰일 날 거 같고. 이런 무게감을 가지고 부담감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바깥으로 구하러 다닐 일을 찾는다면 오해한 것이다. 뭔가 구하러 찾으러 다니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내가 구하고 찾으려는 그 마음 부처를 보지 못하고 계속 부처를 구하려고 좋은 걸 찾으려고 하는 대상을 좇는 거지요.


바깥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 ‘바깥에 부처가 어디 있나, 어디 있나’ 계속 부처를 찾으려고 쫓아다니는 거잖아요. 그 쫓아다니는 그 마음이 부처인데. 눈이 세상을 보면은 ‘내 눈 어디 있지’ 하고 계속해서 세상을 온 천지 다니면서 눈을 찾아봐야, 아니 보고 있는 이놈이 보고 있다,라는 그 자체가 이미 눈이 있다,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바깥을 향해서 눈을 찾으러 다닌다고 해서 눈을 찾을 수가 있겠느냐 말이지요.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