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통일운동가 권영은 선생 영전에
고 권영은 선생은 1981년 출옥 이후 30년 넘게 경북 예천의 고 박충서 선생댁에서 은둔의 여생을 보냈다. 사진 오길석씨 제공.
고 권영은 선생은 1981년 출옥 이후 30년 넘게 경북 예천의 고 박충서 선생댁에서 은둔의 여생을 보냈다. 사진 오길석씨 제공.
통일운동가 고강 권영은 선생이 지난 16일 97살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마감했다. 하지만 문경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남은 선생은 구미의 무연고자 유골 보관소에 방치되어 있으니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시리라.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개인사에 대해 일절 함구한 까닭에 알려진 행적은 많지가 않다. 선생은 1922년 영남의 최고 가문인 안동권씨(동정공파) 집안에서 부친 권태직(조선인 최초 조흥은행 지점장)과 모친 해주 오씨 사이에서 3남6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포항에서 자라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 주오대학 경제학부에 유학한 뒤 돌아와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법대 전신)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간회 등에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하활동을 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도와 근로대중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투신했다. 이승만의 남한 단정 수립에 반대해서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규식 선생의 수행원 자격으로 북행했다. 회담이 결렬되자, 남한 당국의 보복을 우려해 평양에 남아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인민위원회(위원장 이승엽) 산하 재정·물자관리 책임자를 맡았고 연합군의 인천상륙으로 후퇴해 평양에 귀환했다. 1959년무렵 밀사로 서울에 내려오자마자 체포됐다. 22년간 비전향 양심수로 복역한 뒤 1981년 풀려났다. 고향 인근의 경북 예천에서 독지가이자 양심수 동지인 박충서 선생의 보호를 받으며 민족사 연구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2016년 박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요양병원에 의탁해왔다.

선생은 일찌기 사회주의에 심취한 연유나 계기를 직접 말씀한 적은 없다. 다만 10대 중반 대구시절 이웃들의 모진 가난과 참혹한 삶을 목도하면서 ‘내가 잘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일인가? 모두가 잘 살아야 제대로 잘 사는 것 아닌가?’ 의문 속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직계 형제를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어엿한 이름과 지위를 지닌 친인척들이 쟁쟁하다는 사실이다. 전 국세청 차장, 전 부총리, 전 대구은행장, 영국 명문대 석좌교수, 전 지상파 방송사 사장…등등. 선생은 자신의 행적과 이력 때문에 행여 그들에게 불이익을 줄까봐, 평생토록 인연을 끊고, 부인하며, 노심초사로 여생을 보냈다. 1962년 선생의 여동생 결혼식 방명록에 이병철, 정주영 등 기업가들의 이름도 즐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이 더 녹아 내리는 분단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라도 혈육의 정을 되찾아, 유골이나마 폐기되기 전에 귀향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누구라도 말 대신 글로 남긴 사상과 몸소 깨우쳐 실천한 양생법을 챙겨서 유고집이라도 나오기를 기원해본다.

고강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일랑 내려놓고, 먼저 간 지사들 두루두루 상봉하며 회포를 나누겠지요. 김구, 김규식, 조봉암, 여운형, 김원봉, 홍명희… 어르신들께 이승의 얘기도 들려주고 약주도 한 잔 올리겠지요. 이인모, 장준하, 조용수, 김선명, 박판수, 서옥렬, 진태윤, 박충서 선생 등 동지들 끌어 안고 몇날며칠이고 조국통일·외세배격·민족대동단결 의논하면서 회한의 눈물도 흘리겠지요.

“선생님, 작별의 술 한잔도, 제향도 못 사르고 떠나보내 죄스러움을 어찌 다 말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다만, 통일이란 굵은 회초리로 불초 저희들 종아리를 세게 내리처 주소서. 달게 맞겠습니다.” 통곡으로 영별을 고하며!

오길석 / 민족일보 조용수기념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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