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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은 방편, 약일 뿐이지 진실한 법이 아니다>

장백산-1 2019. 1. 23. 19:37

<모든 말은 방편, 약일 뿐이지 진실한 법이 아니다>


산승이 설하는 바는 모두 한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 약일 뿐이지 진실한 법(法, 진리)은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7)


제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들을 그럴싸하게 해도 이 말은 그냥 한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 약일 뿐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실한 건 여러분에게 있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진실한 건’ 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편, 말은 진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세속제(世俗諦 : 세속의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아니다. 참된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방편의 진리일 뿐이다,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방편의 진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참된 출가라 할 수 있으니, 그는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이라도 쓸 만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7)


바르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단 한 푼도 아껴 써야 되지만 참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만 냥을 쓰더라도 허물이 없다. 이 말이 뭐랄까 나름의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것은 꿈,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거를 많이 쓰고 적게 쓰고를 갖고 그 사람의 가치를 논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특정한 것을 한다고 해서 뭐 이걸 잘 했니 잘못됐니 하는 이 세속적인 거는 그냥 관점이 다른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부처님한테 “부처님은 나이도 많이 드셨으니 부처님은 저리 나앉고 저에게 부처의 자리를 넘겨주십시오.” 하고 부처님에게 지속적으로 요구를 했는데, 부처님이 “너한테는 안 준다.” 이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부처님을 뭔가 공격해야 될 거를 찾아야 되겠는데 부처님은 공격할 꺼리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제 제자들을 딱 규합하면서 부처님의 허물을 찾는 게 뭐냐면 부처님이 초기에는 순수했는데 초기에는 절도 없이 그냥 떠돌면서 그냥 무소유의 아주 안 좋은 옷을 입으면서 누더기 옷을 입으면서 산에서 그냥 자면서 수행하는 아주 훌륭한 수행자였는데 지금은 타락해가지고. 그 당시에 부처님 당시에 절을 보시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잖아요. 절도 엄청나게 많이 짓고 그 절을 엄청 크게 국가에서 지어주기도 했으니까.


아주 큰 절을 짓기도 하고 또 대부호들, 장자들이 스님들 전체를 초청해가지고 음식을 화려하게 차려가지고 공양을 올리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까 ‘야 저거를 공격하면 내가 승산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되받았다가 제자들 한 2백 명인가 끌고 나가면서 명분을 어떻게 했느냐면 부처님은 타락했다. 저 좋은 절에서 살고 신도님들이 주는 좋은 음식 먹고 타락했다.


그때 보면 예를 들어 아난존자가 얼굴이 아주 잘 생겼다고 그래요. 아나 존자에게 어떤 여자 신도가 이 가사를 아주, 아주 아름다운 가사를 뭐 백 벌, 천 벌을 보시하고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면 스님들하고 나눠 쓰기도 하고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사실은 누더기 옷을 입어야 되는데 어떻게 그 좋은 옷을 받아 입느냐. 뭐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한 거지요. 그러면서 강화된 계율을 제시했습니다.


반드시 그것만이 절대 원칙이라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오히려 나중에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든 가섭존자에게는 부처님이 나중에 부릅니다. 불러서 ‘야 네가 그렇게 두타행(頭陀行: 승려들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을 하면서 산속에서만 있고 너무 안 좋은 음식만 먹고 안 좋은 옷만 입고 그러면서 너무 그렇게 사는 것도 중도에 어긋나니 이제 들어와서 제자들의 시봉도 받으면서 또 음식도 좀 먹으면서 몸도 추스르고 그러면서 살 거라’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가섭존자가 ‘부처님 말씀이 맞는 건 저도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저 같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서 부처님 제자 중에 한 명 정도는 이렇게 두타행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도 있으면 나중에 이런 방식을 통해서 공부하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제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제가 본(本)이 되는 또 제자가 될 수 있으니 저 한 명 정도는 이렇게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렇다. 그렇게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 가섭존자가 그렇게 하니까 부처님이 인정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특정한 하나의 내 생각을 절대 옳은 것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세간에서의 판단은 절대 옳은 게 없습니다. 방식이 다른 거지. 이게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저게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불사를 하는데 두 군데에서 절을 짓고 있어요. 군 법당에서도. 한 분은 완전 세련된 현대 감각으로 현대식으로 지어요. 기와 뭐 이런 거 안 하고. 단청 이런 거 일절 안 하고. 한 분은 완전 전통식으로 지어요. 뭐 이건 이거대로 좋고 이건 이거대로 좋은 겁니다.


세간의 삶의 방식은 그냥 자신의 인연 따라 살 수가 있고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해서 뭐 그걸로 다툴필요는 없습니다. 법(法)이 중요한 것이지. 그래서 핵심이 중요한 것이지. 겉에 드러난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지요.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