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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중생도 없고 옛날 지금도 없다>

장백산-1 2019. 1. 23. 19:12

<부처 중생도 없고 옛날 지금도 없다>


이 산승의 견처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깨닫는 자는 곧장 몰록 깨달을 뿐,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닦음도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잃음도 없다. 일체 모든 때에 다시 다른 법(法, 진리, 부처)은 없다. 설사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산승이 설하는 바는 오직 이것뿐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49)


공(空)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진리다’ ‘부처가 있다’ 부처가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중생이 있다,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방편으로 부처(진리, 법)를 설한 겁니다. 중생은 뭐냐면 괴로움이 있다,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중생이에요. 그러면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괴로움을 내려놔서 괴로움이 없어지면 그냥 그거를 부처라고 해도 됩니다. 그걸 그냥 부처라고 해요. 그냥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부처이지요.


마치 아픈 사람이 아플 때는 건강의 중요함을 알아서 건강한 삶이 꿈이잖아요.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지만 아픈 게 낫고 나면 그냥 평범하게 건강하게 그냥 사는 거지. 건강한 사람은 건강해서 그냥 살지. 막 건강을 애지중지하게 ‘난 오늘도 건강해’ ‘난 오늘도 건강해’ 하면서 건강을 부처처럼 여기면서 막 기뻐하면서 맨 날 살지 않잖아요. 병이 있다가 나았을 때 잠깐 기쁜 거지. 그냥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건강한 거지요. 병 없는 게 그냥 건강인 거지. 건강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병만 없으면 그냥 건강인 거지요. 그것과 마찬가지다. 중생이라는 견해,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부처라는 방편을 써서 중생에게 괴로움이 없는 자리, 괴로움이 없는 존재, 그걸 부처라고 가짜로 방편으로 이름을 붙여놓은 거예요. 


그래서 괴로움을 없샐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얘기를 한 거지요. 그렇게 방편으로 얘기를 한 다음에는 이 중생이 부처가 되고 나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나면 스스로 부처라는 생각도 없어요.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고 부처라는 생각도 없고. 부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그 두 가지 분별하는 생각이 전부 다 사라져버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옛날도 지금도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 뭐 어디겠습니까. 오로지 지금 이 순간밖에 내가 살고 경험하는 여기 이 자리 이거밖에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도 다 생각 속에서만 있는 환상입니다. 생각이 떠올라와야지만 올라오는 생각 그게 과거나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깨닫는 자는 곧장 몰록 확인할 뿐이지 따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깨닫는 데는 시간이 개입되는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갈고닦아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게 참 미묘한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무조건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또 안 한다고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간절한 발심에 따라서 몰록 깨달을 때는 한순간에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이 자리에 딱 도착하고 보면 닦음도 없고 깨달음이랄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얻고 잃는 것도 없다. 부처도 중생도 없다. 본래부터 그냥 이미 눈앞의 당처(當處)에서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거기 뭐 얻는 게 있고 잃을 게 있겠습니까. 다른 법은 없다. 어떤 하나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법 그건 환상과 같다.


하나의 법,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가 있다고 해도 그건 방편으로 말로 표현한 것이지. 하나의 법,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 하나의 도라는 그런 진실 된 뭔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 불법이 참 헷갈릴 수 있어요. 뭔가 이렇게 귀하고 애지중지한 뭔가 하나가 있다,라고 해야지만 거기에 신심을 내는데 뭐 그런 것을 불교에선 내세우지 않습니다.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