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조 달마(初祖 達磨, ?~495)
(1) 혈맥론(血脈論) ; 상(相)을 취하면 곧 괴로움이다.
『금강경』에 ‘무릇 모습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고 한다. 만약 모습(相)을
취한다면 곧 분별 망상 번뇌에 사로잡혀 그릇된 길에 떨어진다. 모든 모습이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하니
단지 모습을 취하지만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 부처라는 모습, 법이라는 모습, 보살이라는 견해, 보살이라는 모습을
지어내어 부처, 법, 보살이라는 모습이나 견해를 공경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중생의 지위로 떨어지
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 어떤 견해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이 없다.
✔ 진정으로 진리(眞理, 여래, 부처, 깨달음, 본래의 나)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모습, 어떤 상(相), 어떤
견해, 어떤 개념도 취하지 말라.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하여, 상(相)이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相)이 있는
모든 것이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안다고 했다. 그 어떤 상이나, 견해, 모습, 관념을
취하고 상(相), 모습, 견해, 개념, 관념에 집착하면 그즉시 중생의 지위로 떨어져 괴로워진다.
상(相)이란 곧 모양, 모습, 견해, 선입관, 개념, 관념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것과 저것을 서로 구분하려면
이것은 이것대로의 모양이, 저것은 저것대로의 모양이 서로 다르게 분별되고 구분되어야 한다. 바로 그
두 가지로 나누어 분별 구분해 주는 서로 다른 모양, 모습, 견해, 개념, 관념을 상(相)이라고 이름한다.
불교에서는 분별심(分別心)만 타파해버리면, 곧 부처(佛, 法, 진리, 깨달음, 여래, 본래의 나)라 말한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 우리는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깨달은 부처이지만
분별심(分別心)이라는 장애물로 인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분별된 분별상만을 헛되게 인식한다고 한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대상(경계, 현상)을 둘로 분별하고 나누어 인식하는 마음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분별하고 나누는 마음이 분별심이다. 크다 작다로 분별하고 나눠서 대상을 인식하고, 잘났다 못났다로
분별하고 나눠서 대상을 인식하고, 나와 너로 분별하고 나누어 대상을 인식하고, 좋다 싫다로 분별하고
나눠서 대상을 인식하고, 아름답다 추하다로 분별하고 나눠서 대상을 인식한다. 대상을 둘로 분별하고
나누어야지만 그 두 대상이 서로 쉽게 분별되고 구별되어 마음이 재빨리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럼 사람들이 대상을 상대로 일으키는 모든 생각, 모든 마음, 모든 인식은 전부 다 대상을
둘로 나누는 분별심(分別心)일 뿐이다. 분별심(分別心)이 생기는 이유는 곧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가
다 제각각의 모양, 모습,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다른 모양, 다른 모습, 다른 상(相)이 있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을 제각각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 모습, 개념, 관념, 견해, 상(相)을 일컬어
대상을 재빠르게 분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모양이라고 하여 분별상(分別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모양, 모습, 관념, 개념, 견해, 상(相)에는 물질적 물리적인 상(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모양,
모습, 관념, 개념, 견해, 상(相), 즉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와도 같은 상(相)도 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상(相)은 하나의 마음 속에 그려진 개념, 상(相)이지만, 이 또한 분별된 상(相) 분별된 모습이다. 예쁘다
밉다, 못생겼다 잘생겼다는 개념, 상(相)도 내 마음속에 내 나름대로의 틀을 세우고, 스스로 분별하는
개념, 분별된 모습, 분별된 모양, 분별된 견해, 분별상(分別相)이다.
어떤 사람에겐 예쁘게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겐 예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상(相)을 마음 속에 세워놓았기 때문에 똑같은 대상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 속에
세워논 분별하는 개념 또한 상(相)이며, 이와 같이 모든 상(相)은 고정된 실체인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
각자 마음 속에 세워둔 상(相)은 제각각 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키가 170인 사람을 ‘크다’는 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키가 170인 사람을 ‘작다’는 상
(相)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특정한 연예인을 어떤 사람은 잘생겼다는 상(相)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못
생겼다는 상(相)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 저마다의 분별상(分別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별상은
전부 다 이와 같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자기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 환상이기에 허망하다.
연봉을 5,000만원을 받는다는 것이 많이 받는 것인지 적게 받는 것인지, 그로인해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정해진 고정된 실체일까? 그 5,000만원의 연봉이라는 상(相)은 허망하여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5,000만원
연봉에는 그 어떤 진실도 그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다. 년봉 5,000만원은 내 마음이 인식하는 대로 인식되
는 금액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연봉 5,000만원을 많다고 인식하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은 작다고 인식
한다. 많다고 인식하면서 풍요를 느끼고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고, 작다고 느끼면서 비참해하고 궁핍해하
면서 불행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진실할까?
5,000만원 연봉 자체에는 많다 적다는 그 어떤 실체도 없다. 허망하고 진실이 없다. 연봉 5,000만원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5,000만원의 연봉이라는 사실일 뿐, 좋다 나쁘다, 많다 적다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은 연봉 5,000원이라는 그 중립적인 현실에 자기 식대로 분별하여 좋다
거나 나쁘다고 분별해서 말하면서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허망한 괴로움이다.
만약 애초부터 연봉 5,000만원에는 그 어떤 실체도 없고 진실도 없어서, 분별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연봉 5,000만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로인해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똑같이 5,000만원 연봉을
받는 두 사람중에 한 명은 많다며 행복해하고, 또 한 명은 적다고 불행해한다면 그것은 연봉 5,000만원에는
미리 정해진 많다 적다, 부자다 가난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별된 상(分別相)을 통해 보는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 마음속에서 모든 분별상
을 진짜라고 여기며 분별한다. 그 분별은 진실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에서 인식되고 분별된 상
(分別相)을 진실이고 진짜라고 여긴다. 모든 대상을 좋다 싫다, 크다 작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옳다거나
그르다 등으로 분별해서 나눈 뒤에, 좋은 것은 취하려고 집착하고, 나쁜 것은 버리려고 거부하며 집착한다.
좋아하는 것을 집착해서 내 것이 되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고 버리려고 하는 집착심이
자꾸만 나타나도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
야 할 때도 괴롭지 않은가? 이처럼 둘로 나누는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면 취하거나 버리고자 하는 취사
간택심이 생긴다. 분별심(分別心)은 곧 취사심(取捨心)이고, 취사심은 곧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분별심(分別心)이 곧 괴로움(고통)이다.
그러나 중생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분별심(分別心)은 중생 스스로 만든 실체가 없는 허망한, 모습, 모양,
견해, 개념, 관념, 상(相)일 뿐, 진실이 아니다. 그러니 진실이 아닌 허망한 분별심(分別心) 분별상(分別相)
에 어리석고 헛되게 집착할 이유나 필요가 없지 않은가? 대상을 분별하지 않고, 분별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이처럼 분별심(分別心) 분별상(分別相)에 집착하여 치우치지 않고, 특별한 분별상에 얽매여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취사간택(取捨揀澤)하지 않는다면 삶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괴로움도 문제도 없다.
어리석은 중생은 물질적 정신적인 이 세상 모든 현상(대상, 경계, 것, 존재, 法)에 분별상(分別相)을 세워서,
좋다 싫다 분별하면서 취사간택하고, 그로인해 괴로워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일체의 현상에 그
어떤 분별상(分別相)도 세워놓지 않고, 분별상이 허망하다는 진실을 알기에 이 세상 모든 현상을 분별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무 괴로움도 없다.
깨달아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分別相)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이 없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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