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限大로 큰 수레(大乘), 道, 불성, 깨달음

장백산-1 2019. 3. 19. 02:50

無限大로 큰 수레(大乘), 道, 불성, 깨달음



지공(誌公)화상 대승찬(大乘讚) 



大乘讚이라 함은 뭐 아시는 대로 大乘에 대한 찬탄입니다. 大乘은 뭡니까 無限大로 큰 수레죠. 法華經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大乘이란 곧 佛性이고 佛性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부처만이 존재한다 


그런 주의입니다. 大乘이 곧 佛性이라함은 사람이 부처다 하는 그런 주의고, 궁극에 가서는 불교에 어떤 


方便의 敎說이 많다 하더라도 窮極的으로는 부처로서의 삶이 佛敎의 根本 目的이고, 부처님의 마음이고, 


불교의 마음이고, 모든 조사의  마음이다 하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大乘讚, 大乘을 찬탄하게 되고 大乘의 宗旨는 그런 것이고 大乘은 그야말로 大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함께 大乘을 共有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大乘 卽 佛性에는 


僧俗 男女 老小 貧富 貴賤 이런 분별이나 差別이 전혀 있을 수가 없는거죠. 그게 大乘 즉, 佛性입니다.


 

大乘, 佛性이라는 말은 곧 大衆이라는 말이고 大乘에는 아예 열어야 할 門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大乘 즉,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受容하는 것이지 別度의 어떤 門을 열고 어딜 들어가


거나 나가거나 하는 그런 일도 없는 것, 그만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無限大로 큰 것, 아예 안과 바깥이 


없는 그런 無限大의 크기의 大乘 즉, 佛性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大乘佛敎는 곧 大衆佛敎고 大衆佛敎란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이 다 모든 生命에게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共히 해당되고 다 누리고 수용할 수 있는 것 이것이 大乘이다 그런 취지에서 이제 


잘 글을 만들어서 그런 大乘의 길이야말로 眞正한 佛敎의 길이고 불교의 最終目標고 불교의 처음이자 불교


의 끝이다 이렇게 이제 말씀드릴 수가 있죠.


 

참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가 위대하신 지공화상의 大乘讚을 뭐 제가 어찌 속속들이 다야 이해


하겠습니까 마는 그저 내가 이해한 만치 내 그릇만치만 이해하는 것이지만은 그것만이라도 우리가 좀 맛볼 


수 있고 느끼고 거기에 어떤 법희선열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큰 행운이다 이렇게 생


각을 합니다.


 

1.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으나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렵다 


大道常在目前이나 雖在目前難覩라 

대도상재목전       수재목전난도


大道常在目前이나 雖在目前難覩라


제가 번호를 붙여놔서 이야기 하기가 좀 편리하네요. 처음에 두 구절을 한 번호로 그렇게 이제 매겼는데 


大道常在目前이라 大道는 恒常 目前에 있다 그랬습니다. 信心銘에 至道無難이라 그랬죠. 道에 이르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道가 바로 目前, 바로 눈앞에 있다는 뜻이겠죠.

 


大道나 至道나 같습니다. 큰 道나 지극한 道나 뭐 그냥 道라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냥 道가 됐든지 佛道


가 됐든지 仙道가 됐든지 佛道, 禪道, 道, 至道, 大道 이것이 다 똑 같은 뜻입니다. 至道를 이야기 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지극한 道란 뭐겠습니까. 가장 理想的인 삶, 뭐 쉬운 표현을 하자면 가장 幸福한 삶을 말하는 


것이고, 참 나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정말 진정한 幸福 제대로 된 幸福을 누리면서 사는데 아무런 問題 될 


것이 없는 그 문제가 다 떨어져 나간 그런 삶이 이제 大道的인 삶이죠.


 

거기 보면 大道라는 말 그다음에 若欲悟道眞體 또 道가 있죠, 그 밑에 또 言語卽是大道 초기 세 구절에서 


道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道에 대해서 佛敎의 窮極이 道고 처음이 道고 중간이 道고 마지막이 道고 그


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道는 事實은 道不可수율 이라고 道敎에도 말하고 있듯이 道라고 하는 것은 時間的으로도 단 


한 瞬間도 우리가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空間的으로도 여기 말했듯이 目前을 떠날 수 없다. 目前이


라고 함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이 瞬間 이 자리, 이 事實입니다. 그래서 見聞


覺知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뭐 부르면은 대답할 줄 알고 하는 그런 作用들 바로 道, 눈앞, 목전, 그것이죠.


 

제가 명구 해설에 심춘尋春이라는 것을 불교신문에도 올렸고 우리 홈에도 올렸는데 봄을 찾아나섰던 사람


이 하루종일 저기 구름 감도는 언덕배기를 돌고 돌면서 봄을 찾아나섰다가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우


연히 매화나무 가지 밑을 지나는 데 매화 꽃이 피어가지고 미처 매화꽃은 보지 못하고 香氣가 잔뜩 코를 


찌르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보니 매화나무 가지에 매화꽃이 滿發해서 거기에 봄이 가득하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아주 그 참 의미심장합니다. 


 

봄을 찾는다는 게 뭐겠습니까? 幸福을 찾는 것이요, 본래의 나를 찾는 것이요, 지극한 道를 찾는 것이요, 


부처를 찾은 것이요, 바로 그거지요. 道, 부처 그것은 바로 目前에 있는 것이고 한 瞬間도 우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있다는 事實입니다. 또 이것을 


좀 더 쉽게 풀면요 우리는 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現在에는 滿足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未來


의 일을 生覺하고 未來의 어떤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生覺이나 나의 모습 거기에 대해서 어떤 希望을 


걸고 있어요. 



그래서 未來에 대한 生覺이나 미래의 나의 모습 그걸 生覺하면서 기뻐하고 希望을 갖고 그러는데, 그 기뻐


하는 것도 예를 들어서 未來의 어떤 일을 生覺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도 뭡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에 있는 내가 기뻐하는 거예요. 기뻐하는 것은 未來의 일하고는 事實은 아무 關係가 없어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내가 기뻐하고 있는 그 事實 그런 사실을 우리가 알기 어렵다는 거죠.


 

大道常在目前이라는 말을 이렇게 풀어도 될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단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大道


라고 하는 그 本質에 가까이 接近 할 수 있도록 저는 가능하면은 풀고 풀어서 쉽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근


거로 해서 보다 더 높고 깊은 뜻에 다가갈 수 있다면은 그것도 한 方便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雖在目前이나 난도難覩라 비록 道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目前에 있지만은 그 道를 보기 어렵다. 


그렇습니다. 幸福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여기 눈앞에 있습니다. 現在 내가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幸福의 촛점을 맞추지 않고, 늘 없는 저 未來에다 맞춰요. 現在에 없는 未來 그건 假想입


니다. 現在에 있는 것이 實相이죠. 늘 우리는 있지도 않은 未來의 어떤 그 무엇에다가 촛점을 맞춰놓고 기


다리거나 그렇게 하고 있는데 事實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滿足해야 되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모든 問題 解決을 찾아야 되고, 뭐 道라고 하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 만약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하면 소리와 형색과 언어를 제거하지 말라. 


  若欲悟道眞體하려면은 莫除聲色言語 하라  

  약욕오도진체             막제성색언어 


若欲悟道眞體하려면은 만약에 道의 참모습, 道의 참된 본체를 깨달으려고 한다면은 어떻게 해야된다? 莫除


聲色言語하라 그랬어요. 聲 소리 듣는 거죠, 色 보는 것이죠, 言語 우리가 말하고 듣는 그런 事實들이죠. 그


런 사실들 現在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除去하지 마라, 바로 이 일 밖에 따로 道의 참모습이 있는 게 아니


다 그 말예요.


 

지금 여기에서 道의 참된 본체에 눈을 떠야 해요. 結局은 지금 여기에서 눈을 떠야지 지금 여기에서 눈을 


못뜨면 달리 다른 데서는 道의 참 모습에 참으로 눈뜨기가 어렵습니다. 뭐 방이나 할을 통해서 道에 눈을 


뜬 것도 그대로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聲色言語하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말하


고 하는 이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임제스님에게 얻어맞고 道의 참 모습에 눈을 떴든지 또 누가 


뭐 손가락을 세우는 데 道의 참 모습에 눈을 떴든지 간에 역시 같은 일인 겁니다. 聲色言語입니다. 어떤 


行爲를 보이더라도 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우리의 聲色言語하는 일 그 


자리에 道의 眞體가 있다. 道의 참 모습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若欲悟道眞體 하려면은 만약에 道의 眞體, 道의 참모습을 깨닫고자 한다면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現在 우리가 말하고 있는 소리 듣고 있는 소리 듣는 이 일 聲,  色은 우리의 뭐 事物 우리의 肉身을 


위시한 보이는 모든 存在 모든 事物, 言語 말 이런 것들을 除去하지 마라. 道의 참 모습은 聲色言語하는 이 


일 이것을 除外한 다른 것에 있다고 자꾸 生覺을 하는 데, 道의 참 모습은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


리 現在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이 行動 이 事實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


니다.


 

3. 언어가 곧 큰 도이니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가 없다.


   言語卽是大道라 不假斷除煩惱하라 

   언어즉시대도    불가단제번뇌 


言語卽是大道라 그랬죠. 言語, 말이 곧 大道다 그랬습니다. 지금 까지 이런 말은 아무도 못했어요. 後代 사람


들도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이 분이 達磨스님도 들어오기 前에 아주 先代 스님인데 정말 대단한 말씀을 하


셨어요. 言語가 卽是 大道다.


 

不假斷除煩惱하라 그랬어요. 斷除 煩惱 번뇌를 끊어서 除去하는 것을 빌리지 마라, 가자하지 마라. 불교에


서는 가자하다 빌리다 이런 식으로 거짓 假字를 해석해요. 不假斷除煩惱하라 번뇌를 끊어 제거하는 것을 


빌리지 마라 가자하지 마라 빌리지 마라, 그거 煩惱를 除去할려고 하지 마라 그 말인거죠. 왜냐하면 바로 


言語가 大道인데 우리가 말하는 것 듣는 것 이 事實이 그대로 大道야 이게 가장 理想的인 事實이고, 참나고, 


그렇게 찾아 헤맸던 涅槃의 봄이요, 成佛의 봄이요, 깨달음의 봄이다 하는 거죠.


 

言語卽是大道다 이건 정말 뭐 前無後無한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言語卽是大道다 대개 이제 말이


라고 하는 것은 가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방편(方便)이라고 그래요 언어문자는... 허나 천만의 말


씀이예요.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어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입니까 바로 달, 


道, 부처, 불성, 참나, 깨달음, 진리이죠. '그것'은 뭐 손가락이고 방편이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것이죠. 그 


자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런 이야기가 여기는 필요치가 않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 자리 여기는 벌써 


이게 뭐 확철대오해서 눈을 크게 뜬 立場에서가 설사 아니더라도 우리의 감량대로 우리의 그릇만치 우리의 


불교에 대한 상식만치만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고 사유해 보면은 그 나름대로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이해가 돼야 되요.


 

그러니 굳이 煩惱를 끊으려고 하지 마라. 不假斷除煩惱니라 번뇌를 斷除함을 假字하지 말지니라. 아 이거 


참 정말 시원한 말씀이고 일단 뭐 이런 이야기 들으니까 마음이 탁 놓입니다. 뭐 번뇌를 끊으려고 할 필요


도 없고 말이 方便이니 무슨 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니 그런 소리 다 문제 해결 다 된거죠.


 

이렇게 아주 確然하게 같은 言語를 가지고 表現하면서 言語 文字를 가지고 道를 表現하면서도 이렇게 아주 


시원스럽게 하는 예는 또 있습니다. 참 이런 直言이라고나 할까요. 바로 들어보이는 이런 그야 말로 즉설주


왈이죠. 직설주왈 直說입니다. 이런 直說을 만난다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


니다.


 

정말 大道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에 있고 이러한 그 눈앞에 있음을 이렇게 말해주니까 


지공화상이 이렇게 우리에게 들려주니까 우리가 그런대로 道를 짐작을 하고 알게 되는 거지요. 만약에 


설명해주지 않는다면은 모르죠. 하루종일 사용하고 써도 道를 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道 속에서 있어


도 道 속에 있는 줄을 모르죠.


 

그래서 참 뛰어난 經典 또는 조사스님들의 語錄이 뛰어난 說法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설법의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고 값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寶物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은 볼 수가 없죠. 


보물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보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太陽이 아무리 밝아도 또 봄빛이 저렇게 아름


다와도 눈에 문제가 생겨 버리면은 제대로 사물을 볼 수가 없으며 그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어요.


 

그렇듯이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準備 이게 돼 있어서 우리가 이런 因緣이 되고 또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信心이고 그게 淸淨한 마음이라고 하는 거죠. 깨끗한 


마음이 준비 되어 있다. 그 깨끗한 마음은 關心입니다. 뭐 깨끗한 마음이 무슨 따로 있겠습니까 마음에 


뭐 때가 묻은 거나 물론 이제 그런 표현들도 많습니다만은 바로 이런 그 理致에 이런 참다운 理致를 說


하는 이런 이야기에 우리가 재미를 느끼고 關心을 기울이는 그것이 淸淨心이예요. 또 이것을 福으로 따진


다면은 청복(淸福)이라고 할 수 있죠. 청정한 복이다.


 

道를 깨친다고 해서 뭐 돈이 생깁니까 밥이 생깁니까 아무것도 생기는 거 없죠. 그런데 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目前에 대단한 道, 眞理, 깨달음이 있고 대단한 어떤 법희선열이 있고 그렇지요. 그걸 느낄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것 이게 청복 깨끗한 복이다 그랬습니다. 청정한 마음에 청정한 복이 오는 거죠. 


청정한 마음이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대한 理解와 關心입니다. 그러니까 이해와 관심이 


있으니까 이런 것을 재밌어 하고 즐길 줄 알고 이런 일에 눈을 뜨는 그런 그 청복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