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죽기 전에 미리 반드시 해야만 할 공부

장백산-1 2019. 3. 23. 11:37

죽기 전에 미리 반드시 해야만 할 공부


흔히 「마음공부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질문하는 이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공부는「지금은 어리석지만 나중에가서 깨닫는」, 그런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사람들이「본래부터 있는 '성품'(본성)을 잊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말일뿐, 결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시키고 바꾸어서 깨달은 사람의 마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있는 성품(본성)은,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성품>입니다. 마음, 즉 성품(본성)은 무시 이래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끝이 없이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 본성은 생겨난 적도 없으며 사라진 적도 없는 것이어서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항구 불변하는 마음, 본성을 잊어버리고는, 마음(본성)에 비추어진 끊임없이 변하고 생(生)과 멸(滅)을 계속 반복하는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실체가 없는 현상(대상, 경계, 존재)들을 마음(본성)인 줄 잘못 알고는 허망한 모든 현상들에 집착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현상, 즉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고, 맑고 깨끗하고, 자연스럽고, 텅~비어 고요한 움직임이 없는 마음(본성)이 아니라, 마음(본성)에 비춰진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실체가 없는 생각, 즉 환상(幻想)입니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당신 자신을 깨달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지만 무시무종으로 불생불멸로 영원히 항상하는 마음(본성)을 되살려 내서 그 마음(본성)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깨달음의 삶, 깨달음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 마음(본성)을 밝히는 데는 아무런 노력도 시간도 장소도 필요치 않습니다.


- 마음(본성)은 본래부터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아무것도 밖에서 얻을 대상이 


  없습니다.


- 마음(본성)은 어떤 특정한 도구(명상이나 참선 좌선 등)에 의지하여 반복적으로 갈고 닦아 아는 대상이 


  아닙니다.


- 잊고 있었던 마음(본성)을 되살려 내는 데는 아무리 좋은 것도 없는 것만 못하니,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서는 진척이 안됩니다.


- 마음을 밝히는 일은 지금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해서 나중에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 마음을 밝히는 일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대신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마음 밖으로만 내달리면서 온갖 허망한 이상(理想), 해탈, 열반, 성불, 도통(道通)만을 추구하던 그 마음(본성)을 안으로 되돌려서,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고, 맑고 깨끗하고, 자연스럽고, 텅~비어 고요한 마음(본성)을 문득 깨닫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 항상 행복과 평화를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생멸법(生滅法), 생사법(生死法), 즉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환상(幻想)부터 깨버려야 합니다. 육신이 태어나고 죽어 사라져버리는 것도 생멸법 생사법인 환상입니다


바다는 평생토록 파도가 출렁거리면서도 끝내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아무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다의 겉모습일 뿐인 파도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하는 듯이 보이지만, 파도의 본체(本體)인 '바다'는 평생토록 늘 그대로인 채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전혀 아무런 이론이나 학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진실(眞實), 진리(眞理), 실제(實際)가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것(자연, 自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다와 파도의 관계처럼「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적도 없는 진리」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이치, 즉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 근간을 이루는 이치는 사실은 전혀 어려울 것도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평범한 이치이며, 사람들의 일상생화(日常生活) 자체가 불생불멸, 불거불래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사실 앞에서 왜 그렇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즉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은 그것이 모두 마음(본성), 진실, 진리, 실제, 실재의 겉모습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마음(본성), 진실, 진리, 실제, 실재를 몽땅 전부 다 보고,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똑 같은 것 같은 나날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매일같이, 아니, 매순간마다 경험하는 이 현실세상의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의 파도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저 바다가 다만 바람을 따라 파도치면서 파도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는 쉬지 않고 늘 파도치면서 출렁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흡사한 것입니다. 분명히 '바다'는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파도가 치거나 말거나 항상 바다의 성품과 모습(바다의 고요함과 파도의 움직임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유지하면서 생멸하거나 증감하는 일이 없습니다. 즉 '바다'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현실세계도 사실은 바다처럼 상주불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실상, 실제 모습은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무수히 많은 인연(因緣 :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마치 저 바다가 바람이라는 인연 따라서 파도치는 허망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상(實相), 실제 모습은 결코 생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은 인연의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연 따라 항상 생성과 소멸, 생(生)과 멸(滅), 생겨남과 죽음을 계속 반복하는 모든 이 세상의 변화하는 모습은 마치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처럼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실재(實在), 진실, 진리, 실상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인연 따라 생겨났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 즉 생멸법(生滅法) 생사법(生死法)은 생겨나도 생겨나는 적이 없고,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사라지는(죽는) 일도 없는, 이 <불생불멸의 이치>,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진실>에 눈을 뜨는, 즉 이 세상의 참 모습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불과 300 여년 전, '코페르니쿠스'라는 천재가 나타나서,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설파했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맛보았을까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지동설(地動說)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결코 움직이는 모습이 없는, 말 그대로 요지부동인 지구가 매순간 엄청난 속도로 맹렬히 자전을 하면서 이 우주공간을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시각적 경험과는 상관없이 현대의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멀게는 2500 여 년 전 '붓다'에 의해서, 또 가깝게는 20 세기 초엽, 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된  "모든 존재가 존재인 채로 존재가 아니고, 모든 움직임이 움직임인 채로 움직임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고, 이 말에 믿음을 내고, 믿어 이해하고,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 말을 단지 어떤 특정 종교의 오묘한 교리쯤으로 치부하고, 숫제 깊이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는 게 작금의 실정입니다. 


모든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일체 존재는 모두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처럼 실체가 없기에 허망하여, 실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진실한 존재의 세계, 이른바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조차 없는 이 세계의 참모습, 본성에 들어서서, 그 본성에 모든 것을 맡겨 자유자재로 활동하면서 대자대비의 원력(願力)을 발휘하여, 까닭없이 분별 망상 번뇌라는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만 있다면 이 어찌 대장부의 본분사가 아니겠습니까? 뜻이 있고 힘이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힘써야 할 일입니다.


마음공부를 할 때는 공부를 하되, 죽었다가 깨어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았다가 죽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단지 방편일 뿐인 경전이나 조사어록이나 문구를 찾거나 그 속에 적혀있는 구절을 좇지 말 것이며, 누가 한 방편상의 말도 기억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될 뿐입니다.


-현정선원, 대우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