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면 그것이 깨달음 입니다.
4.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대의 한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요
단지 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면 그것이 깨달음 입니다.
어느 날 조주(趙州)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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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진리>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깨달음>이 저 내 마음 바깥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이 라는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진리 깨달음을 추구하는 탐구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진리 깨달음>에 대해 지어내는 숱한 '말'이나 '생각'들과, 이미 자신이 기억해 간직하고 있던 <진리 깨달음>에 대한 '이미지, 생각'을 서로 대조해보면서, 그 새로 지어내는 깨달음 진리에 대한 이미지 생각 중에서 자신의 기존의 진리 깨달음에 대한 기억과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골라내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리고는 골라낸 그런 이미지 중에서 <절대한 경지>라고 생각되는 그 이미지에 집착하여 그 이미지 그것이 <진리 깨달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지요.···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린 이미지에 불과한 <진리 깨달음> 그것은 <진리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우상(偶像)>, 환상(幻想, 허깨비)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투영(投影)한 '이미지'에 적응해 가는 것을 "진리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건, 학문의 이름을 빌어서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진리 깨달음>을 추구해서 얻겠다는 거의 대부분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불자(佛子)를 자처하는 이들도 '붓다'의 한결같은 가르침, 즉 스스로를 돌아보라(회광반조 廻光返照 하라)는 말씀을 입으로만 되뇌일 뿐,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그 참뜻을 깊이 참구(參究)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단지 바깥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을, 억제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고, 또한 합리화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매순간순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이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행위, 즉, 생각하는 거,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가 마치 바다에서 매 순간순간 일었다 사라졌다하는 무수한 파도의 움직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소위 깨달음 진리를 얻기 위한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완전히 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 순간순간 일었다 사라졌다 하는 파도의 움직임이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파도의 움직임 그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바다에 무수한 파도가 일었다 사라졌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도 그 <파도>들은 <바다>가 아니었던 때가 없습니다. 파도가 곧 바다요, 바다가 곧 파도인 것이지요(波水不二, 水波不二).
사람을 포함한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 우리의 <존재> 역시 단 한 순간도 바다와 같은 <참된 하나>에서 벗어나거나 분리된 적도 없고, 결코 벗어나거나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참된 하나>가 '진리 깨달음'을 찾아 방황하는 <나>라는 이름의 '파도'의 모습도 드러내고, 또는 '진리 깨달음'을 찾았다고 진리 깨달음에 대한 기쁜 기분에 젖어 있는 모습도 드러내는 겁니다.
하지만 진리 깨달음, 도, 부처, 본래의 나 등의 방편이 가리키는 <참된 하나>는 그 어떤 모습도 취사선택(取捨選擇)하지 않습니다. 마치 맑은 거울이 그 거울 앞에 다가오는 어떤 모습도 아무런 차별 분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내듯이 말입니다. 좋아함 싫어함의 선택은 오직 그 한 <파도>, 그 한 <그림자>만이 독자적인 <나>라고 확실하게 여기면서 하나의 파도, 하나의 그림자에 집착하는 미혹한 사람들의 몫일 뿐입니다.
조주(趙州) 선사의 물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우리들의 알음알이, 식(識), 분별심(分別心)은 계속 굴르고 있습니다.··· 단지 그와 같은 알음알이를 굴리는 주체가 없다는 말일 뿐이지요. 그저 인연(因緣) 따라 <참된 하나>가 인연(因緣)에 순응해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겁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의 본래 성품>, 즉 <참된 하나>가 우주 전체에 두루두루해서 어는 곳, 어느 것에도 미치지 않은 곳, 것이 없기 때문에 즉, <본래의 나>가 곧 이 <우주>이기 때문에, 일체의 물음도 대답도 모두 <본래의 나>, 즉 오직 <참된 하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답이 옳다커니 그르다커니, 무엇이 좋다커니 싫다커니 하는 모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인식의 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정신적인 현상 물질적인 현 그 모두가 전부 <본래의 나>, 즉 <참된 하나>의 살림살이 입니다.
그러니 생각 하나가 일어날 때 그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맴돌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얼른 그 생각이 나온 <당처(當處)>를 되돌아 살펴서, 즉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한 생각이 일어난 근원(根源), 당처(當處), 본래의 나, 참된 하나를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목전(目前)의 물질적 정신적 모든 현상들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온전하여, 모든 현상들에는 다시 어떠한 노력이나 조작도 붙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붓다'의 한결같은 가르침 입니다.
- 대우거사님 / 가산님 제공 - 무진장 행운의 집 cafe.daum.net/yourhappy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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