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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깨달으려면, 견성체험

장백산-1 2019. 12. 3. 15:12

진리를 깨달으려면, 견성체험  - -  법상 스님-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여기에 독립적인 '나'가 있고, 독립적인 '나' 바깥에 독자적인 외부세계, 즉

대상(경계)이 있다고 여겨서 '나'와 '외부세계'가 실재한다고 허망하게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적인 내가 나와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외부세상을 인식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는데요, 그 떡국을 두고 어떤 사람은 짜다고 느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싱겁

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떡국을 두고 싱겁다  짜다는 느낌이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짜다 싱겁다 라고 느껴지는 것일까요?


나에게 짜다 혹은 싱겁다 라고 그렇게 느껴지는 감각일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짜거나 싱거운 떡국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짜거나 싱거운 떡국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짜거나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실체가 없는 느낌입니다.


다른 사람은 떡국의 맛을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떡국과는 다른 떡국이 있는 것입니다.


에를 들어 한 여인을 봅니다. 한 사람은 그 여인이 너무 예쁘다 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밉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사람 사람에 따라, 사람의 인식에 따라, 인연 따라 존재할 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여인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미운 여인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이것을 일러서 인연

가합(因緣假合)으로 있다, 가짜로 있다,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무아(無我)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있을 때만 그런 존재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일 뿐입니다.


그 여인 뒤쪽에 있던 자신의 여자 친구를 보고 있는 남자라면, 그 여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하나의 존재, 하나의 대상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사람들

각자의 의식에 의해서만 가합(假合)으로 가상(假想)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을 일러 십이처(十二處 ;

육근 + 육경), 십팔계(十八界 ; 육근 + 육경 +육식)가 전부 다 공(空)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즉, 나(육근)와 세상(육경)과 인식(육식)은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독립적

으로 내가 있고, 바깥에 독립적으로 세상이 있고, 따라서 독립적인 내가 독립적인 세상을 독립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세상, 인식 그 세 가지가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인연화합(因緣和合)을 

할 때만 가짜로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일 뿐입니다.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몸, 생각), 육경(六境 ;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의 대상), 육식(六識 ;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 분별의식) 3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 

대상(육경이라는 6가지 경계인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의 대상)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화합되어야지만 인연 따라 여섯 가지 대상이 있는 것처럼 가짜로 거짓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는 것이어서(此有故彼有), 이것은 저것을 근거로 해서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십이처(육근 + 육경)가 서로 접촉할 때 만들어진 허상, 그림자인데 이

실체가 없는 환상, 허깨비,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맞다고 여기고, 진짜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사람들 각자의 자기만의 가상세계가 건설되는 겁니다.


짜고 싱거운 떡국은 대상인 떡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처럼, 사실 대상(육경)이라는 것이 

내 바깥에 독립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6가지 감각기관이 6가지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생겨납니다. 나와 대상은 동시생(同時生), 동시멸(同時滅)하는 것이지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으로 이렇게 나누어 

분별할 수는 있지만, 사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것들은 서로서로 따로따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곧 봄이고, 봄이 곧 보이는 대상이며, 보이는 대상이 곧 보는 자입니다. 이 세 가지

는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나와 세상과 봄이 서로서로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

라, 그렇게 서로서로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다고 인식(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는 쪽을 견분(見分), 보이는 대상을 상분(相分)이라 해서, 하나의 의식을 중생들은 

보는 부분(견분)과 보이는 대상(상분, 보이는 모양)으로 둘인 것으로 착각(錯覺)을 한다고 말합니다.


나와 세상은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곧 세상이고, 내가 곧 보는 작용이며,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작용이 둘이 아닙니다. 꿈 속 세상에서는 나와 세상이 따로따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꿈에서 깨어나서 보면 꿈 속에 있었던 나와 세상과 그  꿈 속 세상 속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전부가 

다 하나의 꿈이었을 뿐임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곧 그것입니다. 내가 곧 세상입니다. 보는 자가 곧 보는 대상입니다. 다만 생각이 착각을 일으켜, 

나와 세계를 둘로 갈라놓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 즉 둘이 아닌 존재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