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불광 2020년 1월호, 특집 - 기도(祈禱)
기도(祈禱)의 의미를 묻다 - - 법상 스님
법상 스님
글. 남형권, 사진. 최배문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목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 진정한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 기도가 어떻게 깨달음과 이어지고, 기도는 수행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불교와 마음공부, 선(禪) 분야의 대표적인 유튜브 채널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이끄는 법상 스님을 만나 기도(祈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기도(祈禱)란 무엇인가요.
빌 기(祈)에 빌 도(禱)자를 쓰잖아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도는 말 그대로 뭔가를 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해놓고 기도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등 자기가 정한 목표에 대해 기도하고 그 목표를 이루면 행복할 거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그 기도(祈禱) 목표는 본인 생각, 즉 분별(分別)로 만든 환상(幻想)일 뿐이에요. 분별심(分別心) 자체가 허망한 생각, 즉 망상(妄想)이고,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망상(妄想) 생겨납니다. 분별심(分別心)을 강화시키는 기도(祈禱)는 자신을 더 강하게 옥죄기도 합니다.
부모가 부모가 원하는 자식의 어떤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수록 집착이 심하게 되어 자식은 더 힘들어지고 답답해하기도 하죠. 전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도를 조금은 편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도(祈禱)가 있죠. 참회의 기도, 감사의 기도, 만족의 기도 등 오히려 이런 기도(祈禱)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祈禱)죠.
더하는(+) 기도보다는 빼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생각해요. 용서와 참회의 기도, 비움의 기도, 만족과 감사의 기도 등은 더하기(+) 기도가 아닌 빼기(-)의 기도입니다. 빼기(-)의 기도는 인간의 괴로움(인간의 근본 고통, 苦)을 소멸시키는 기도죠. 밀림 속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듯이 부처님 모든 가르침은 4성제(四聖諦)에 포함된다고 했어요. 사성제(四聖諦)의 핵심은 괴로움의 소멸인데요, 기도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야겠지요.
분별과 망상을 끊임없이 더해가는 삶 속에서, 기도를 통해 분별 망상과 집착을 뺄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Q. 분별 망상과 집착을 빼는 기도로 삶에 대한 진취적인 태도나 열정, 살아갈 힘이 사라지진 않나요.
절에 살면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은 스님들에게나 좋지, 우리 중생들에게는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고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란 말이 있죠. 머무는 바 없이, 집착함 없이 마음을 내어 쓰라는 겁니다.
무엇을 하되 한 바가 없는 무위행(無爲行)이 불교의 진정한 행입니다.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달려가 성공하면 행복, 실패하면 괴로움이라고 만드는 게 바로 유위(有爲), 즉 조작(造作)입니다. 업(業)을 지어가는 유위행(有爲行)과 달리 무위행(無爲行)은 깨달음의 행이라고 합니다.
고등래퍼라는 TV 프로그램에 김하온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처음에 나와서 떨어졌는데 두 번째 나와서는 1등을 했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성공하고, 과시하려고 음악 하지 않겠다. 내가 즐거워서 음악을 하겠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더라고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모든 사람의 신앙과 같은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죠.
“'No pain No Gain(고생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이라는 말이 사람을 속박하는 하나의 '프레임(frame)' 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고통 없이는 얻는게 없다 라는 말이 너무 잔인하지 않니? 그래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라고 말했습니다.
집착이 클수록 두려움도 함께 커지는 법입니다. 집착이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순수(純酬)한 열정(熱情)이 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은 “오후에 재미있는 놀이터에 가니까 오전에 조금만 놀아”라고 해도 오전에 완전히 전력을 다해서 놀죠. 푹 자고 다시 깨어난 후 오후에 또 100% 힘을 다해 놀아요. 에너지 낭비가 없고 쉴 때 쉬니 순수한 열정이 피어나죠.
과도한 집착엔 삿됨이 끼어듭니다. ‘내가 조금 안 좋은 일을 해서라도 진급해야지’와 같은 거죠. 마음을 비울 때 오히려 더욱 순수한 열정이 피어납니다.
Q. 수행의 관점에서 기도란.
기도는 방편(方便)으로서의 기도와 본질(本質)로 다가가는 수행이라는 참된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매일 밤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가 ‘삶이 꿈이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힌트가 아닐까 생각해요. 방편으로서의 기도는 꿈속에서 나쁜 꿈이 아닌 더 좋은 꿈을 꾸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本質)로 다가가는 수행이라는 참된 기도는 단 하루라도 빨리 꿈에서 깨어나자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대로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이 세상 이 모든 것이 실재(實在)가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는 허망(虛妄)한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죠. 방편(方便)으로서의 기도(祈禱)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열심히 빌죠. 그런데 참된 깨달음의 관점에서의 기도(祈禱)는 이루어져도 꿈이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죠.
당장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집안이 가난하거나, 몸이 너무 아프거나, 정신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힘든 사람에게 아무리 마음공부를 하라거나, 깨달음 공부를 하라고 해도 안 통하죠.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맞춰서 단계별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재가자나 당장 힘든 사람에게는 복(福)을 지어라, 착한 행동을 해라, 계율을 지켜라 등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쉬운 얘기를 해주셨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근기가 성숙되었을 때 제욕(諸欲)의 과환(過患), 출리(出離)의 공덕에 이어 결국 사성제(四聖諦)라는 괴로움의 소멸(消滅)에 이르는 열반(涅槃)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고 해요. 그런 점에서 기도 또한 방편으로 필요합니다.
내가 만약 A라는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기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A대학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숭산큰스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죠. 내가 정말 그 대학만 가야 하는지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이 진실이거든요. 어쩌면 다른 대학에 내 인생을 바꿔줄 많은 귀인들이 있어서, 원하는 대학은 떨어졌지만 다른 대학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을 나와 크게 성공할 수도 있죠.
이처럼 인간의 의식(意識), 의지(意志)는 내 인연(因緣)이 어느 대학인지 어디인지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를 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최선은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는 않게 됩니다. 나는 모르니 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죠. 이게 진정한 기도입니다.
집착 없이 행하면 언제나 법계, 즉 진리의 세계가 나를 완전히 도와줍니다. 또한 최선은 다하되 결과에 집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결과에 상관없이 언제나 나의 평화는 깨지지 않는 것이죠.
Q. ‘오직 모를 뿐’, 하지만 끊임없이 선택(選擇)하고 변화(變化)하는 게 삶이 아닐까요.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어보죠. 제아무리 파도가 일어도 파도는 바다일 뿐입니다. 분별 번뇌와 망상이 올라와도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 번놔가 바로 깨달음이다)이고,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즉 생사가 열반이고, 꿈에서 깨어난 세계와 꿈속의 세계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즉 내 생각이나 의도(파도)에 집착은 안 하지만, 그 또한 바다에서 올라온 것을 알기에 생각이 올라오면 그 생각에 대한 차별이나 분별없이 텅~빈 마음으로 저지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이 일어나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자기의 분별 망상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그 생각을 저지르지 못해요. 제가 학생 때 어떤 스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해 주신 게 “저질러라”였어요. 표현하는 것이 성불(成佛)의 지름길이라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서 끙끙 앓다가 끝나는 것보다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차일 때 차이는 게 훨씬 아름답다고요.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보면 어쩌나, 고백했다가 차이면 어쩌나, 이런 걱정과 분별 망상 때문에 고백을 못 하잖아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모를 뿐’하며, 과도한 집착이 없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저지르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실천합니다. 그러니 무집착, 모를 뿐, 비움을 말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내려놓을 때 더 큰 열정과 실천이 뒤따릅니다.
아는 지인이 유튜브 불교채널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고 하길래 일단 저질러 보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모를 뿐’하며 내맡기고, 고민 없이 일단 저지르라고요. 처음 몇 달은 어차피 몇 명 밖에 안 볼 텐데 잘 안 나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전혀 의미가 없죠.(웃음)
Q. 기도가 어떻게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세상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먼저 기도를 하세요. 다만 집착 없는 기도를 하세요. 기도는 응급처방과 같습니다. 응급상황이 끝나면, 이제 괴로움을 해결하는 사성제(四聖諦) 공부, 마음공부, 발심(發心)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기도하라’는 말은 없지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깨닫고 말겠다는 발심(發心)을 하라는 말은 계속 나옵니다. 깨달음으로 갈 때 중요한 건 발심(發心)이에요. 마음만 일으키면 공부는 저절로 됩니다. 가짜 자기, 가짜 나만 보느라 내 안의 부처가 있는 걸 몰랐는데, 발심(發心)만 하면 내가 본래부처니까 본래부처가 본래부처를 확인(確認)하기 위해 그 발심(發心)이 현실화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내 안의 부처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본래부처는 완벽한 노력으로 나를 돕고 있었는데 나 혼자 막았던 거예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확인(確認)하겠다고 발심(發心)하면 저절로 자기 안에 답이 생깁니다. 꿈에서 깨어나겠다는 발심(發心)이 핵심입니다. 그럼 내 괴로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온 우주 법계가 나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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