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를 판단없이 있는 이대로 보기만 할 뿐 - - 법상 스 님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말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世俗諦)라 부르고, '진짜' 진리를 제일의제(第一義諦), 승의제(勝義諦)라고 불러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진리(眞理)가 일단 언어로 표현되고 나면 한 번 왜곡(歪曲)되고, 언어라는 상(相)으로 그려져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어 언어로 짜맞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과라는 진짜 사과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과'라고 이름붙였을 뿐이지, '사과'라는 이름 속에 사과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과라면 사과를 먹고 싶을 때, 그 이름만 들어도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사과라는 이름, 언어에는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설명하는 방편에 불과할 뿐인 모든 말 언어에는 진짜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이런 것일거야', '해탈, 열반은 어떤 것일꺼야' 하고 아무리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상이고, 이름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 아닙니다.
견성, 성불, 해탈, 열반, 참나, 본래면목, 주인공, 부처, 진리, 근본성품, 법신, 불성, 텅~빈 바탕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현전 등등의 방편인 그 어떤 말에도 참된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절대로 말에 떨어지지 말라'고 설합니다. 말만 붙잡아서는, 언어에 집착해서는, 특정한 상으로 그린 그림을 붙잡아서는 방편인 진리라는 말이 가리키는 '그것'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도, 사과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사과에 대한 사진도, 결코 사과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과를 깨물어 먹어 보면 될 뿐, 먹어 보고 나서 그 사과에 대한 맛을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로 설명해 버리면, 벌써 자기의 분별식(分別識)대로 해석한 자기만의 분별심(分別心)이 되고, 해석된 것이 되기에 진짜 사과와는 어긋나 버립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경험해 보세요. 이름 붙이지 말고, 그림 그리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말로 표현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느껴보세요. 보되 본 것을 해석하지 말고, 듣되 들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느끼되 느끼는 것에 대해 이름 붙이지 말고, 그저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 생각 이전, 텅~빈 바탕, 본래자리에서의 생생한 경험입니다.
생생한 존재 자체이지요. 눈 앞에 뭐가 보이나요? 그냥 보기만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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