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고향 자성청정심을 찾아서

장백산-1 2020. 1. 11. 16:07

마음의 고향 자성청정심  -  청담 스님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올바르게 이끌어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도록  


자는 것”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로 ‘생사를 해탈한 대자유인’ 되자는 게 청담스님의 한결같은 주장



한국불교의 사상적 기반인, 조사선(祖師禪)의 정신과도 맞닿아 역대 조사들의 향기 묻어나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온갖 혼돈과 어리석음이 비쳐지니, 먼저 나를 찾아 나의 


정체(正體)를 파악해야 한다. 진아(眞我 : 진정한 나)를 체득함으로써만이 어떤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본연(本然)의 자세를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전 세계 시민들은 각자 마음


에서 상실했던 본래의 마음,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찾아서 진정한 나, 즉 진아(眞我)를 확인


해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계문명과 물질만능의 문명 예속에서 벗어나서 나와 세상 본연의 


영원성과 자유와 평화를 향해 전진하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 청담스님,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마음(心)이 곧 불(佛 부처) (심즉시불, 心卽是佛)'이라 했고 ‘평상심


(平常心)이 도(道)’라고 했다. 멀리 갈 것 없이 마음만 잘 이해해도 世上의 眞理, 즉 우주(宇宙)의 본질(本


質)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청담스님이 법문에서 ‘마음’을 누누이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를 함으로써 생사(生死)를 벗어난 大自由人이 되자는 게 스님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인간이 할 


일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이는 한국불교의 사상적 기반인 조사선(祖師禪)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청담 스님의 법문에는 역대 조사들의 향기가 묻어난다.



청담 스님의 법문은 육조혜능의 사상적 지평과 일치



“인간의 이 마음만이 유일(唯一)한 실재(實在)이며 眞理이며 宇宙의 根本  본바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우주의 사물과 온갖 겉으로 드러난 형상(形相)에만 정신이 팔려서 평생을 헤매기만 하다가 끝


끝내 안심(安心)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도인(道人)들은 자신의 생명인 이 마음을 살


펴서 필경에는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어 生死를 초월하여 自由自在하게 되는 것이니,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그것이 곧 眞理 즉, 法이요, 佛(부처)요, 마음이요, 또한 허공(虛空)이요, 


유정 무정의 이 세상 모든 것들이다.” (청담스님 ‘신심명 · 선입문’)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창시하고 육조 혜능(慧能)이 완성한 祖師禪은 동아시아 불교의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현존(現存), 즉 인간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니 헛되고 


허망한 형상과 관념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현존(現存), 즉 인간의 마음(心), 부처의 


마음(佛)를 찾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름 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특히 육조혜능은 자성청정심


(自性淸淨心)을 역설하며 인간 마음의 本來 바탕은 깨끗하고 때 묻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다만 허망


하고 헛된 시비(是非) 분별(分別) 망상(妄想으로 인해 분별된 ‘내 마음’ 혹은 ‘착한 마음’이란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집착과 갈등,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이다. “자성(自性)은 항상 청정(淸淨한 


마음이다.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 구름 위는 항상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해와 달 별을 볼 수 


없는 것이다.<육조단경>” 청담스님의 가르침은 육조 혜능의 사상적 지평과 일치한다. ‘마음’ 바탕은 


투명하고 완전하다며 일정한 規定과 限界가 있는 自我 즉, 내 마음이란 관념(觀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행이란 마음의 절대적인 경지, 즉 인간 마음의 본바탕을 체험하는 일이다.



“자기와 자연과 우주와 하나가 된 자기와 대상이 일체화(一體化) 된 체험이며, 주와 객이 나뉘어지지 


않은 순수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크게 한번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처럼, '나'라는 환상(幻想)이 


죽어 버리고 완전히 없어진 데서 참으로 자타일여(自他一如)의 무상(無相)의 본연의 나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객불이(主客不二)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객미분, 


주객일여 순수경험이 그대로 선체험(禪體驗)이 아니고 거기에도 각(覺)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覺)은 깨닫는 체험이다. 체험으로 알아차리고 눈뜨는 일이다. 이 경지를 견성(見性)이라 하며 직관


(直觀)이라고도 한다. 문득 새로운 세계를 보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새로운 세계란 


깨달음(見性)의 세계다(신심명 · 선입문).”



혜능이 정립한 마음이 곧바로 부처다(즉심즉불 卽心卽佛)의 정신은 마조도일 선사에 이르러 더욱 무


르익었다. 그는 평상심(平常心)을 화두로 모든 중생을 부처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평소 일상생활에


서 쓰고 사는 사람의 마음이 바로 도(道), 부처, 깨달음, 진리, 본래의 나, 진정한 나(眞我)라는 말이다. 


짐짓 꾸미지 않고, 이러지 저러니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것만 좇지 않고, 무엇이 있다느니 없다느


니 분별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평범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하는 분별 차별(分別 差別)을 하지 않


는 마음이 도(道)이다 <마조어록>”. 마음에 얽매여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음이 분별심(分別心)이라면, 


분별심(分別心)이 벌리는 활동에서 自由로운 마음이 평상심(平常心)이다. 청담 스님은 분별심(分別


心)의 바탕엔 평상심(平常心)이 있음을 알고 평상심(平常心),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로 돌아와 


자중하고 자족할 것을 당부했다.



“평상심(平常心)은 항상 밝은 지혜(般若)로 사물을 올바로 보며, 스스로 찰나찰나 창조적인 妙한 작용


(作用)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分別心이 쉴수록 깊은 이해와 좋은 


생각들이 샘솟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平常心의 特性입니다. 이처럼 인간 마음도 번뇌 망상 분별 


생각에 물들지 않고 생사와 열반에 섞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now 


& here)에서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완전히 깨달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허


망하게 이 육체(肉體)를 ‘나’라고 잘못 알아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계산하기 때문에 온갖 분별 번뇌 


망상을 내어 이 분별 망상 번뇌가 나를 지배하고 이 때문에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죽이고 때로는 좋아


하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음자리가 더러워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자리는 본래 


부처(심즉시불 心卽是佛)이고, 화를 낼 때나 웃을 때나 본연의 자세 그대로 청정(淸淨)합니다.”



일제강점기하에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수호한 만공(滿空) 스님은 일찍이 청담 스님의 높은 안목을 


알아봤다. 강원(講院)을 마친 청담 스님은 수덕사 내 정혜사에서 당시 선지식(善知識)이었던 만공스


님의 지도 아래 선(禪) 수행에 전념했다. 무(無)라는 話頭를 벗 삼았던 철저하면서도 빈틈없는 수행


과정은 후일 한국불교의 정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 그날 밤 나는 만공스님과 함께 기울어 가는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았고 그날 밤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후의 


내 발걸음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다(‘입산 50년을 돌아보며’).” 



만공스님은 청담스님의 지혜와 기백에 전법게를 주고 깨달았음을 인가했다. “傳也三十棒(전야삼


십방) 전한다는 것은 30방이요 受也三十棒(수야삼십방) 받는다는 것도 30방이니 棒也三十棒(방야


삼십방) 또한 30방의 방을 付與兀然子(부여올연자) 올연(청담스님의 또 다른 법명) 수행자에게 


부쳐 주노라.”




무엇보다 청담스님의 마음사상은 불교정화운동의 이론적 기초로 기능했다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청담스님에게 정화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현실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길이었다. “불법


(佛法)이란 청정본연(淸淨本然)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淸淨)도 두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어찌 부정(不淨)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淨化)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부정(不淨)이 있음을 


또한 어찌하랴.” 본래 청정(淸淨)이나 부정(不淨)이란 것도 근원에서는 헛된 관념(念




)에 불과하나, 교단에 만연한 ‘구체적인’ 부정(不淨)에 의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최고의 


가치까지 왜곡되고 말살되는 상황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막행막식(莫行莫食)은 바라밀이 아


니다. 이런 걸 모르고 무식한 선지식은 음주식육(飮酒食肉)은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 막 놀아난다. 


그래가지고 중생까지 버려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려놓는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아무렇게 사는 마음’이라고 곡해하며 탐욕을 즐기는 대처승의 위선을 개탄한 것이다.



현상으로서의 육신(肉身)은 생(生)과 멸(滅)이라는 현상이 있으나 사상(思想)은 영원하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청담스님의 사상과 생애를 조명한 방남수 평택 청담고 교장은 이렇게 밝혔다. 


“청담 스님은 청정한 그대로의 자리가 ‘마음’이라 하였으며 그대로를 현실에 실현시키는 것이 바른 


수행이라고 설한다. 그가 강조한 삶은 바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불보살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강조하였으며, ‘봉암사결사’도 ‘정화불사’도 모두 ‘마음자리’와 ‘마음사상’에 


바탕을 둔 수행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란 분별망상을 인정하되 분별 


망상에 얽매이고 집착해서 부녈 망상에 구속되지 않는 마음이지, 분별 망상이 이끄는 대로 휘둘리는 


마음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아니다. 아울러 청담스님은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성


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비루했던 한국불교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스님의 슬기와 용기는 오늘날


에도 유효하다. 고승 관련 연재기사의 일반적인 순서와 달리, 열반을 마지막이 아닌 중간에 다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신은 생멸하나 사상은 영원하다.



[불교신문3144호/2015년10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