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冥想), 알아차림이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을 하는 이유는 분별하던 습관을 분별 이전으로 돌려놓기 위함이고
생각 · 판단 · 분별하는 의식적인 습관을 내려놓을 때 세상의 참 모습 보여
명상을 대승불교 · 초기불교에서 다양하게 설명하지만 결국은 '하나'
“사람들은 생각, 개념, 식(識)으로써 무엇을 안다고 하지만 그같은 앎은 분별이고 망상”이라며 “모든 분별 망상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그때 비로소 세상의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을 제대로 확인(確認)할 수 있다”고 스님은 말했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에 드러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모든 것들, 사람들이 삶, 인생, 세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완전히 허용해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드러나는 모든 것들을 해석 판단하지 않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어떤 대상이 거울 앞에 앞에 오더라도, 거울은 대상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전혀 그 대상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거울 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춰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상(冥想)을 할 때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하던 습관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과거에 만들어진 틀인 생각, 기억, 판단, 해석이라는 틀에 자꾸 걸러서 보게 됩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개념 짓고, 시비 분별을 할 때는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되, 명상(冥想) 할 때는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에서 드러나는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허용해서 받아준다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드러나는 모든 경험의 대상,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귀에 들리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냄새, 혀를 통해 보는 맛, 피부로 감각되는 촉감, 생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一切)’, 즉 이 세상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 즉 일체(一切)는 12처(十二處)라 합니다. 12처(十二處)란 눈‧ 귀‧ 코‧ 혀‧ 몸‧ 뜻(六根)에서 색(모양)‧ 성(소리)‧ 향(냄새)‧ 미(맛)‧ 촉(감촉) ‧법(모든 존재)(六境)으로 경험되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을 합한 12가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처(十二處), 즉 일체(一切), 즉 이 세상 모든 것을 ‘내 눈이 바깥 세상을 본다’고 여깁니다. 내 몸에 눈‧귀‧코‧혀‧몸‧생각이 있고, 바깥에 경계로 색‧성‧향‧미‧촉‧법이 있어서 내 몸이 바깥의 대상을 경험한다는, 이것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안다고 하는 ‘이 세상 모든 것’입니다.
12처(十二處)는 ‘무아(無我 : 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교리입니다. 무아(無我)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비실체성이다. 즉, 눈‧귀‧코‧혀‧몸‧생각도 없고 이것들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2처(十二處)는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가르침의 다른 설명이고, 이 세상 모든 것, 즉 일체(一切), 즉 12처(十二處)는 진짜 실제로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연기(緣起)되어서 실제로 있는 것 처럼 있을 뿐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연기법(緣起法)을 자세히 설명하면 삼법인(三法印)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인데 항상하는 것이라고 잘못 여겨서 괴로울 뿐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내 눈으로 바깥에 있는 죽비를, 다른 사람을, 이 세상 모든 것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너무나도 고질적인 오래된 습관적이고 고착화된 생각이어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멈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몸에 붙어있는 눈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진실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같은 질문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눈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본다’는 내 생각이 당연하게 맞다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진실, 사실, 진짜가 아니라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머리로 배워서 안 가짜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기일 때는 그렇게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머리로 배워서 안 가짜 지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천진난만한 애기들은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함이 없이 세상을 볼 때는 그냥 볼 뿐입니다. 애기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좋다 싫다, 아름답다 추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태어난다 죽는다, 간다 온다, 여자다 남자다, 주인이다 손님이다, 시작이다 끝이다, 건강하다 아프다, 전쟁이다 평화다, 착하다 악하다, 지위가 높다 낮다, 향기다 악취다, 지혜롭다 어리석다, 인색하다 많이 베푼다, 믿는다 안믿는다고 전혀 분별하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전체로 보았습니다. 애기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이름도 개념도 붙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냥 보고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애기가 차츰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는 부모의 가르침을 배워서 아는 지식(知識)을 머리에 축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지식으로 무엇을 안다고 여길 때부터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錯覺)인 오류(誤謬)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카드의 한쪽에는 비행기 그림이 있고, 다른 쪽에는 ‘비행기’라는 글씨를 써 놓은 카드를 앞 ‧뒷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것이 “비행기다”라고 아이에게 계속 주입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이런 모양은 비행기라고 머리에 입력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아이에게 그 카드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아이가 “비행기”라고 답을 하면 박수를 칩니다. 이 아이는 비행기라는 이름과 모양을 알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행기를 안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말하면 알음알이, 식(識)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알음알이, 식(識), 그것이 진짜 비행기를 아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름과 모양만으로 비행기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름과 모양만으로 비행기를 안다는 생각 자체가 허망한 분별 망상입니다. 육식(六識 :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피부의 의식, 생각의 의식)과 육경(六境 :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과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피부, 뜻)의 이 십팔계(十八界 : 18 가지의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空)하다는 것이 이것을 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명상(冥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분별심, 생각, 개념, 식(識), 알음알이에 걸러서 이 세상을 규정해 놓고 이렇게 분별된 세상을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겁니다. 어떤 소리가 들릴 때 ‘내가 어떤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진실입니까? 이렇게 물어볼 때 여러분들은 ‘아, 12처는 공(空)하다고 하니까 공(空)한 나의 육근(六根)이 공(空)한 내 육근 바깥에 있는 공(空)한 육경(六境)을 보는 것은 다 공(空)한 것이다’고 생각하면 이런 생각은 또 다른 알음알이일 뿐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진리(眞理)와 하나가 됨을 막습니다. 방편으로 사용하는 진리(眞理)라는 말을 알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眞理)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것'을 체험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뭘 보았다,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전부 생각이 하는 작용입니다. 그 같은 생각을 빼고, (죽비를 들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비를 보았다’라는 말은 벌써 내가 지금 여기 있고, 죽비는 저 바깥에 있어서 나와 죽비는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즉, ‘죽비 소리를 듣는 내가 별도로 있고 들리는 죽비소리가 별도로 있다’는 분별심, 생각으로 죽비소리와 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곧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즉 생각 분별심 망상입니다.
진짜는 바로 무슨 소리 무슨 소리라는 분별이 아니 소리 그냥 그 소리 그 자체입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즉 생각 분별심 망상없이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하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즉 생각 분별심 망상하던 습관을 다 내려놓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에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검증 가능한, 경험 가능한 이 세상의 참 모습,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명상(冥想)이고 알아차림입니다. 이 세상의 진실(眞實)은 불이법(不二法), 즉 쪼개진 것이 아닌 하나입니다. 내가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들림’이 경험될 뿐입니다. 들으려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저절로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모양이 저절로 경험될 뿐인 겁니다. 들리는 소리, 보이는 모양이 그대로 근원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뭘 하던 ‘내가’ '나를' 붙일 필요 없는 겁니다. 그냥 들린다는 경험, 그냥 보인다는 경험이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냥 집에서, 책을 보다가, TV를 보다가, 무엇을 하는 중이라도 좋습니다. 그것들을 잠깐 멈추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 텅~빈 바탕자리로 있어 보십시오. 무엇이 알아차려 집니까? 미세한 전자음이 알아차려 집니까? 미세하다는 말도, 전자음이라는 말도 빼고, 그냥 '이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 텅~빈 바탕자리가 경험됩니다. '이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 텅~빈 바탕자리는 모를 뿐이고 그냥 알아 차려질 뿐입니다. 무엇이라고 분별되는 알음알이도 내려놓고, 그냥 들리고 보일 뿐입니다. 저절로 보이고 들리는 경험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인연(因緣) 따라 생겼다가 인연(因緣) 따라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인연(因緣)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因緣) 따라 사라지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저절로 알아차려 집니다. 내 머리 뒤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고개를 뒤로 돌리면 보이지 안던 것들이이 저절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보이는 모든 것들, 사람, 사물, 사건, 사고를 보자마자 그것들을 상대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합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냥 볼 뿐, 그냥 들을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첫 번째 자리’라 말합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나라는 주관(主觀)이 있어서 저것이라는 객관(客觀)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없이 그냥 볼 뿐, 그냥 들을 뿐입니다. '첫 번째 자리', '근본 자리'에서는 분별인 나라는 주관(主觀)도 없고 너라는 객관(客觀)이 없습니다. '첫 번쩨 자리, 근본 자리, 본래의 나, 근본성품, 부처, 도, 마음, 깨달음, 진리, 법이라고 말하는 방편(方便)의 말이 고구정녕 가리키는 자리,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에는 주와 객, 선 악, 부자 가난뱅이, 지위가 높다 낮다, 여자와 남자, 죽음 탄생, 탄생과 죽음, 가고 옴, 시작 끝, 건강과 아픔, 아름다움과 추함, 향기와 악취, 좋아함 싫어함, 순풍 역풍, 몸과 마음, 지혜와 어리석음, 구두쇠와 베푸는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어떤 분별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연기법(緣起法 : 원인과 조건이 맞나서 생겨나는 모든 것)과 이 세상 모든 것, 일체(一切)라고 하는 십이처(十二處 : 육근 + 육경)라는 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안근=눈=보는 나)이 있을 때 저것(색경=대상=죽비)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此無故彼無).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저것, 주와 객, 보는 것과 보이는 대상은, 서로 상대가 있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연생 할 때 저것이 동시생 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은 따로 떨어져서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법(緣起法), 즉 서로 상호 관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모든 존재는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뜻합니다. 연기법(緣起法)은 곧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연기법의 자리,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의 자리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볼 뿐 이것 저것 다양하게 나뉘어진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분별심(分別心)은 두 번째 자리, 즉 두 번째의 독화살을 맞는 나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분별심입니다. 그냥 봄의 자리, 첫 번째 자리, 그냥 저절로 보임, 볼 뿐인 자리는 분별심으로 쪼개진 세계가 아닌 전체입니다.
명상을 하는 목적은 분별적인 주와 객으로 나뉘어지던 세상을 분별하기 이전의 세상으로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명상을 할 때, 어떤 소리가 나면 그냥 그 소리를 경험해 보십시오. ‘내가 저 소리를 듣는다’라는 분별하는 생각 없이 그 소리와 같이 함께해 보십시오. 그 소리를 이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위빠사나'라고 하여 “분별하지 말고 알아차리라”고 하고, 선불교에서는 “(죽비를 치며) 이것뿐”이라고 합니다. 교리에서는 ‘정견(正見)’,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말로, 저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경험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그냥 그것대로 허용하라, 판단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 같지만 결국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 중에서 어느 것에서든 ‘탁’ 하고 본인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느 때 회광반조(回光返照)되어서 알아차려서 깨달음으로 전환될지 알 수 없다 보니까 대승불교, 초기불교, 선불교에서 다양한 방법, 다양한 방편, 다양한 수단으로 깨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깨달음이 ‘중도(中道)’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실천은 중도(中道)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불교 수행법의 본질(本質)을 보면, ‘불이중도(不二中道)’라는 가르침 하나입니다. 위빠사나, 선(禪), 받아들임, 내맡김 등의 모든 수행법이 전혀 다르지 않은 ‘불이중도(不二中道)’라는 가르침 하나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나와서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그저 이 경험과 함께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어디에서든 잠시 문득 돌이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인 명상(冥想)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2020년 2월6일 부산 금련사에서 봉행된 ‘금련사 2월 목요 명상법회’에서 법상 스님(금련사 주지, 유튜브 ‘법상 스님의 목탁소리’ 운영자)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25호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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