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이제 우리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쳐서 「생겨나(生)는 일도 없고 멸(滅)하는 일도 없어서, 항상 저절로 '참되고 여여한 법성'(진여법성,眞如法性)을 밝힘으로써 세속의 생멸법(生滅法), 즉 생사법(生死法 :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인연(因緣)을 따르면서도 끝내는 움직임도 작용도 없는 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움직임도 작용도 없는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 눈앞에 있는 거예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들이는 일 없이, 다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 눈앞에 있는 이대로 바로 <인연을 따르되 변함이 없는 세계(수연불변,隨緣不變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움직임이나 작용이 없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 텅~빈 바탕자리,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금이라도 애를 쓴다면 곧 움직임이나 작용이 없는 자리에서 어긋납니다. 지금 여기, 눈앞, 목전(目前), 텅~빈 바탕자리에서 어지럽게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이 계속 펼쳐지고 이어지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가 적멸(寂滅)한 거, 공(空)한 거예요.
이같은 작용이 그대로 작용이 아닌 도리(작즉무작 作卽無作)임을 분명히 깨달아서 전혀 인위적인 아무 조작도 없이 몰록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요? 「시간도 노력도 밑천도 들이는 일 없이 곧바로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애써 인위적인 노력을 들여서 이루는 것, 즉 유위행(有爲行)을 통해서 이루는 모든 것들은 허망(虛妄)한 것들입니다. 얻은 것은 곧 잃고, 이룬 것은 곧 허물어지고 하는데 어찌 그런 것들을 참된 것들이라고 하겠어요? 이것이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경지를 얻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던가, 반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은 애써 노력을 들여서 증득할 게 없다고 알아서 공부하지 않는다던가 하면 양쪽 다 틀린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하는 것' '하지 않는 것'은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면 틀린다. 하지 않으면 더 틀린다」는 말을 한겁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합니다. 그리곤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게 인위적인 유위행(有爲行)을 버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행'(無爲行)에 들어야 한다고 떠듭니다. '유위행(有爲行) 그대로가 '무위행(無爲行)'입니다. '하는 일(유위행)'이 그대로 '하지 않는 일(무위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몸'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활동하지 않는 몸'이라는 말입니다. ···
여러분, 이 세상은 무시(無始) 이래로 털끝만큼도 움직인 적이 없어요. 오늘도 저 바다는 종일토록 출렁입니다만, 바다는 끝내 늘고 줄고(增 減), 생겨나고 죽고(生 滅), 더러워지고 깨끗해지고(垢 淨)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은 머리로 생각으로 지식으로 헤아리고 따져서 알아낼 일이 아닌 거예요. '진실'이 본래 그런 겁니다.
그래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 사람의 경지를 일러서 '부동지(不動地)', 즉 '움직임도 작용도 없는 자리'라고 말하는 거예요. 또 이 부동지(不動地)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제8지 보살'(第八地菩薩)이라고 하구요. 또 '부동지'를 다른 말로 '동진지(童眞地)'라고도 하는데, 이같은 말들은 다 '세간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는 전혀 헤아려 짐작할 수 없는 '참된 지혜'가 비로소 생겨나는 경지라는 말입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 사람의 경지, 부동지(不動地), 동진지(童眞地)에 이르기 전에는 여러 가지 방편(方便)인 말이나 비유에 의지하면서 열심히 갈고 닦아서, 보다 높고, 보다 깊은 경지를 '계발'하기도 하고, 증득한 바도 있는데 이것은 순전히 '인과법(因果法)'을 따르면서 '유위행(有爲行'을 하는 '세간의 지혜'(世間智)였는데 반해, 이제 '생겨남(生)나고 멸(滅)하는 것이 없는 도리',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 마친 제8지, 부동지(不動地), 동진지(童眞地)에 이르러서는 전혀 인위적인 노력을 들이는 일이 없는 지혜(무공용지 無功用智), 즉 '움직임이 없고 작용이 없는 근본지혜 (無作根本智)'가 드러나서, 비로소 어린 소년이 처음으로 '참된 지혜'에 이르는 '첫머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동진지(童眞智)'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본래 '움직임이 없고 작용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에 의지해서 운용(運用)되고 있다는 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서 한번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인위적으로 공(功, 노력)을 들여서 무슨 일을 할 때 무얼 가지고 공(功)을 들입니까? '몸'과 '입'과 '생각'을 갖고 인위적으로 공(功)을 들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연기법(緣起法)'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자체의 성품(體性)'이 없는,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번개 이슬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런데도 아직 '내 몸(身)'과 '내 입(口)'과 '내 생각(意)'은 여전히 몸, 입, 생각이 제각각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우길 수가 있겠어요? 그렇다고 우기는 것이 정말 뿌리가 깊은 집착, 업장, 고집, 망상, 환상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 망상, 환상, 집착, 업장, 고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어리석은 생각, 망상, 환상이 '자기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 즉 어리석은 생각, 망상, 환상을 부정한다는 게 두려운 거예요. 그같은 어리석은 생각, 망상, 환상, 집착, 업장, 고집에서 깨어나는 것은 조금도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두렵기는 커녕, 지금껏 평생을 두고 숙명처럼 지겹게도 짊어지고 다니던 그 천 근 만 근이나 되는 짐인 어리석은 생각, 망상, 환상, 집착, 업장, 고집을 단숨에 집어 팽개칠 수 있다면, 그게 어찌 두려워할 일입니까?
'몸'으로 짓는 행위, '입'으로 짓는 행위, '생각'으로 짓는 행위들이 전부 다 바로 그 무겁고 지겨운 짐이였던 겁니다. 이것을 신(身, 몸) 구(口, 입) 의(意, 생각) 세가지 업(業), 삼업(三業)이라고 말합니다. '자체의 체성'이 없어서 전혀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삼업(三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알고 천진난만한 '본래의 성품, 근본성품'을 등지고 살았던 까닭에 오랜 겁(劫)을 두고 '생사의 고해(生死苦海)'를 헤매는 신세,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거듭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런데도 아직도 이같은 사실을 성큼 깨닫지 못하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문 밖에서 서성이며 망설이고 있는 건, 아직도 무시(無始) 이래로 줄곧 꾸어오던 끔찍한 '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꿈을 깨버리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무시 이래로 계속 꾸어오던 끔찍한 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그 꿈속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분주히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는 바쁘게 이쪽 저쪽으로 방황하다가 홀연히 그 끔찍한 꿈을 깨고 나면, '본래의 나'는 여전히 언제나 움직임과 작용이 없는 자리,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 자리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걸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무시(無始) 이래로 줄곧 꾸어오던 끔찍한 '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니까 아무리 해도 이 '나'(我)라는 '굴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에, 하루는 아주 작정하고 한 바탕 이씨름을 벌였어요. 끔직하고 무거운 짐인 그 꿈,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그 꿈에서 깨어나는 그 일만 해결된다면 또 다른 거 할게 뭐가 있겠어요?···
『당신은 지금 살아있는 게 분명하니까 당연히 '생명력'을 갖고 있겠지요? 생각하고 말하고 몸을 움직이고 하는 바로 그 '생명력' 말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보통의 경우 얼마나 황당한 질문입니까?
『네? 물론이지요. 당연히 생명력을 갖고 있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만약 당신이 아무런 애를 쓰지 않아도 그 생명력이 저절로 늘상 유지될 수 있다면 그같은 생명력은 분명 당신의 생명력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말이에요.』
『? ···』
『어때요?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또 뭡니까? 물도 마셔야 하고, 물론 공기도 호흡해야 하고, 그래야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만약 밥, 옷, 물, 공기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생명력은 당신의 생명력이 분명합니다. 어때요? 밥, 옷, 물, 공기, 햇빛 없이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는 살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나'는 살아 있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에겐 고유의 생명력이라고 할 만한 게 본래 없는데, 그렇다면 '밥'이 사는 겁니까, '반찬'이 사는 겁니까? 아니면 '물'이 사는 겁니까, 공기가 사는 겁니까? 그것은 분명히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산다'는 건 과연 뭡니까?』
『? ···』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수행'을 함네 하고 설치다가, 나름대로 한 소식했다고 떠벌리는 꼴을 보다 못한 선지식(善知識)이 그 자에게「죽과 밥의 기운으로 재롱 부리지 말라!」고 한 마디 하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수행의 주체'가 '나'인 줄 알고 있는 동안은 '나'(我)라는 '굴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그 꿈에서 깨어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는 것은 천 리 밖이에요. ···
이제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멸하는 것일 뿐,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의 주체'도 없다」는 말, 즉 생멸법(生滅法)이라는 말이 실감나고 믿어집니까? '닦는 자'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게 어김없는 '진실'이라면, 여러분이 이 경지에 이르면 '몰록 쉰다'는 말인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흔히 수산주(修山主)로 통하는 소수 선사(紹修禪師)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 모든것은 '마음의 광채'요, 이 세상 모든 '인연'은 다만 '근본성품'의 비추어냄일 뿐이기에
본래 어리석은 사람도 없고 본래 깨달은 사람도 없나니 다만 지금 여기서 당장 몰록 깨달아 마칠 일이다."
후에 이 게송을 본 심문분(心聞賁) 선사는 맨 끝 구절인「다만 지금 여기서 당장 깨달아 마칠 일이다」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서,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 』 하고, 짐짓 어리둥절해 하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 텅~빈 바탕자리에서 당장에 몰록 쉬지 못하고, 다시 생각을 굴리고,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그 말 뜻을 더듬고 헤아린다면 '나'(我)라는 '굴레', 즉 허깨비,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세가지 업(業)을 '나'인 줄로 잘못 아는 그 꿈에서 깨어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는 것은 다시 삼천 년은 족하게 기다려야 할 겁니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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