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절대 무(無)의 경지, 무한한 자유(自由)의 경지 무엇이 사람들을 골치아프게 하는가?
내 마음을 갉아먹는 근심과 걱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아마 상당수의 분별 망상 번뇌의 주범은 내가 만든 고정관념(固定觀念)에 묶여 고정관념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라도 당사자가 고정관념에 집착하면 그 사람 마음엔 바늘구멍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벽이 만들어지고 만다. 고정관념에 분별하는 생각, 분별하는 마음이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는 말이 있다. 애시 당초에 한 물건도 없다는 의미다. 원래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람 마음의 본바탕은 물론 모든 사물의 본바탕도 본래는 텅~비어 있어 이 세상 어떤 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이 텅~비었기에 어떤 것도 잡을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이기에 털끝만큼도 집착할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혜능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며 때가 낄 것인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라고 말했다.
그렇게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비어 있다. 본래가 무일물(本來無一物)
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저 세상으로 갈 때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비어 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손익, 대립과 갈등, 근심과 걱정,
분별 망상 번뇌 또한 본래 텅~비어 있어 없다. 사람들이 텅~비어있는 것에 붙들려 사니 그것이 문제다.
텅~비어있는 것에 붙들려 노심초사하면서 안절부절하니 오히려 대립과 갈등, 근심과 걱정, 망상, 번뇌만
깊어지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 줄 알면 탁 놓고 말 터인데, 큰마음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무일물(無一物)이라는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비어서 한 물건(一物)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무일물(無一物)이 역설적으로 말해서 한 물건(一物)이다. 이 한 물건 한 물건(一物을 일컬어 천지(天地)가 열리기 전에도 있었고 천지(天地)가 무너진 이후에도 있는 것이라고 선사들은 말한다. 천지(天地)가 수없이 열리고 무너져 사라진다 해도 그 한 물건(一物)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나 빛을 발한다고 한다. 밝기로 말하면 한 물건(一物)은 태양과 달보다 더 밝다고 한다. 그 한 물건(一物)은 허공(虛空), 우주(宇宙)보다 크고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다. 말로 전할 수도 없고 어떻게 그려낼 수도 없는 한 물건(一物), 즉 무일물(無一物)이다.
한 물건(一物), 즉 무일물(無一物)은 흔적마저 없기에 청정하고 광활하다. 불가측(不可測) 불가량(不可量)이다. 왜 그런가? 한 물건(一物)이 무일물(無一物)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이 한정(限定)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허공이나 우주만한 큰 보자기가 있다한들 그 보자기로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을 쌀 수가 없다. 그 한 물건(一物)으로서 무일물(無一物)은 어떠한 집착의 때나 흔적마저 없기에 청정하고 광활하다. 한 물건(一物), 즉 무일물(無一物)의 모습은 사실 자로 잴 수 없는 것이며 어떻게 규정지을 수도 없다. 청정본연(淸淨本然)하다.
그 한 물건(一物)이, 그 무일물(無一物)이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 다만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생각으로 한 물건(一物), 무일물(無一物)을 가둬놓고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서성이고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이렇게 사는 모습은 맨 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요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꼴이다.
어느 날 혜능에게 남악회양이 찾아온다.혜능이 남악회양에게 묻는다. “어디서 왔는가?” 회양이 말한다. “숭산에서 왔습니다.” 혜능이 다시 묻는다. “어떤 물건(物件)이 이렇게 왔는가?” 회양은 이 말에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8년 동안 “어떤 물건(物件)이 이렇게 왔는가?”와 씨름하다가 의문이 풀려 다시 혜능을 찾는다.
회양: 제가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혜능: 깨달은 바가 무엇인가? 회양: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혜능: 한 물건(一物)은 가히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인가? 회양: 한 물건(一物)은 닦아 증득함이 없지는 않사오나 때 묻거나 더럽혀질 수는 없습니다.
한 물건(一物), 무일물(無一物)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측량될 수 없다.
남악회양이 찾은 것은 ‘무일물(無一物)’, 즉 한 물건(一物)이다. 한 물건(一物)을 찾고 보니 무일물(無一物)을 한 물건(一物)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무일물(無一物)을 한 물건(一物)으로도 규정(規定)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은 사람의 마음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며 생각의 잣대로 측량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은 절대로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말로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지 않는다.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을 ‘마음’이라 말해도 틀리고 ‘부처’라고 말해도 어긋난다. 마음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사람들이 분별심, 분별하는 생각으로 규정(規定)지은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한계(限界), 모든 규정(規定)를 벗어난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이 내 안에 세상에 충만해서 고동치고 있다. 사람들의 보잘것 없고 조그마한 생각과 집착으로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一物)을 어떤 무엇으로 틀 지우는 순간 거기에 고정되어 활로가 막힌다.
향엄 지한(香嚴智閑)의 오도송을 보자.“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네. 지난 해는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었지만(去年無卓錐之地) 올해는 그 송곳마저 없노라(今年錐也無)”
송곳마저 없다는 향엄의 이 말은 철저한 청빈을 전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진정한 의도가 아니다. 송곳이라는 한 물건(一物), 무일물(無一物)마저도 없다는 말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마지막 근거인 송곳, 한 물건(一物)마저 탁 놓아버린 절대 무(無)의 경지다. 대자유의 경지다. 이 정도까지는 못갈 망정 자신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에 비추어 자신을 되돌아 볼 일이다.
-고명석, 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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