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눈앞에는 티끌만한 어떤 것도 없다

장백산-1 2020. 4. 14. 01:01

7. 눈앞에는 티끌만한 어떤 것도 없다                             


어느덧 그늘이 그리운 계절이군요. 요즘엔 시골에 가도 잘 볼 수 없게 된 풍경이지만, 어릴 적에 땡볕에서 뛰놀다가 땀방울이 송송 배어난 이마에 매미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정자나무 그늘은 더 없이 정겨운 쉼터였죠. 그런데 이때, 한숨 돌리고 난 어린아이 눈에 아득히 다가선 건 뭉게구름과 맞닿을 듯이 솟아 있는 나뭇가지예요. 나무가지 맨 끝에 한들한들 매달린 잎새에 시선이 멈출 때면, 어린아이 소견에 문득 엉뚱한 생각이 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 가냘픈 나뭇잎이 어떻게 저 땅속 깊은 뿌리에서 저렇게 까마득히 높은 데까지 물기를 빨아올릴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이 만든 힘센 펌프로도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밤낮 없이 계속 그렇게 물기를 빨아 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체 누가,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내는 걸까? 뿌리는 또 어떻고? 저 딱딱하고 캄캄한 땅속에서 어떻게 구석구석까지 가는 실 뿌리를 뻗어서 그리도 용케 물기와 양분을 가려낼 수 있는 걸까? 그런 것이 참 신기했어요.


사람들은 보통 이런 나무 같은 경우 우선, 그 '본래 하나'인 나무를 토막토막 조각조각 여러 부분으로 토막내고 나누어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즉,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 등으로 나누고 분별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다음,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들이 마치 제각각 고유의 기능을 하는 독립적인 존재인 양 여기고는,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들 서로간에 서로 주고받는, 주체와 객체의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거예요. 즉 뿌리가 땅속에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해서는 이것을 줄기에 전달하고, 줄기는 수분과 양분을 받아서 가지로 전달하고, 가지는 다시 수분과 양분을 잎사귀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저 땅 속 뿌리에서 부터 맨 끝 꼭대기의 잎사귀에까지 수분과 양분이 전달된다고 알고 있는 겁니다. 꽤 그럴싸한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본래 <하나의 나무>라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곧잘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뿌리, 줄기, 가지, 잎새들은 제각각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依持)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상생(相生)적인 관계의 존재인 겁니다. 「'이것'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느니라」 한 붓다의 말씀이 바로 이런 뿌리, 줄기, 가지, 잎새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 잎새 중의 어느 하나만 없어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 줄기, 가지, 잎새가 마치 제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됐는지 참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건 아직 서막에 불과합니다. 그 '하나의 나무' 자체는 또 어떨까요? 하나의 나무는 과연 독립적인 실체일까요? 하나의 나무는 '땅', '물', '공기', '햇빛' 등이 없어도 나무 저 혼자서 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또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탄산가스'를 배출하는 여러 '동물'들이 없이도 탄산가스를 마시고 사는 '식물'이 혼자서만 살 수 있겠어요?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엔 저 혼자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낱낱의 존재들은 다 뭘까요?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낱낱의 존재들은  다만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심(分別心), 허망한 분별의식, 허망한 분별하는 생각으로 지어진 가상(假想)의존재, 즉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대자연의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면 어떻겠어요?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몽땅 인간의 무지(無知),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난 허망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면, 그것은 진정 강력한 전류에 감전된 듯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거예요. 이런 경로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이른바 연각승(緣覺乘, Pratyeka-buddha)입니다.


연각승(緣覺乘) 처럼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는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기만 해도 사물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얼마나 모호하고 엉성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호한 엉성한 시각을 깨끗이 해소해 준 것이 우리가 이미 밝힌 바 있는 연기설(緣起說),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연기설(緣起說), 연기법(緣起法) 여기서도 자칫 놓치기 쉬운 함정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그 함정이 뭐냐? 인연화합이 이루어질 때, 화합하는 '인연(因緣)'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알아봤 듯이 낱낱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것들은 전부가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말하자면 전혀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본래 하나'인 세계를 다만 사람들이 '망령된 의식(妄識)', 분별심, 분별의식, 분별하는 생각으로 토막토막 조각조각 구별하고 차등하고 분별한 것일 뿐, 이 세상의 그 무수히 많은 생각이 있고 생각이 없는 것들, 광물, 생물, 식물, 동물, 태양, 달, 공기, 바람, 대지,별 등이 몽땅 실재성이 없는, 허망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서 인연화합을 하겠어요? 그러므로 연기법, 인과법 중에는 실체성이 있는 '진실한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 인과법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지요.


그러나 이렇게 연기법, 인과법이 비록 속 빈 강정처럼 '빈 말'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또한 연기법, 인과법을 결코 허물지 않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눈밝은 깨어있는 수행자이기도 한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각기 개별적인 실재성이 없다는 사실,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름'이 결코 스스로 성립될 수 없고, '모습'도 사람의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선 저절로 세워질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땅', '산 물', '유정 무정' 등의 온갖 '이름'들은 다 가짜 이름이요, 온갖 모습은 다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일 뿐입니다.


온갖 이름과 온갖 모습 이 모두가 범부들이 망령된 분별의식, 분별심, 분별하는 생각으로 그려낸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임을 분명히 밝혀냄으로써, 이 세상에 더는 '볼 만한 것'이 없고, '알 만한 것'도 없어서, 마음이 언필칭 백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처럼 환히 밝아지면, 이것이 바로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우뚝 드러나는 순간이요, 이것이 곧 '부처'가 출현(出現)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일러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라는 도리입니다.


마음, 법, 부처, 도(道), 선(禪), 나아가서 온갖 '있는 것', 온갖 '일어나는 일 이들 모두가  '같은 하나'의 다른 이름이요, '같은 하나'의 다른 현상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본래 스스로 청정한 한 마음,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공적영지(空寂靈知)을 떠나서는 티끌만한 한 법도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루 종일 어지럽게 '가고 오고'(去來), '들고 나고'(出入),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성괴, 成壞), 생겨나고 사라진다(生死)고 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만 한 마음,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는 거울에 비친 허망한 그림자일 뿐, '본래 마음',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공적영지(空寂靈知), 한 마음 자체는 전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어떤 것도 변하지 않고 주욱 이어지며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순간도 머무는 일이 없는 거죠. 또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즉, 두 손바닥이 맞부딪쳐서 손벽소리가 나긴 하지요. 그러나 이때 손바닥에 감추어져 있던 무엇인가가 두 손바닥을 칠 때 튀어나와서 손벽소리가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어떤 물질적인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에서 결과로 옮아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무엇인가가 이어진다는 착각(錯覺)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옮아간다는 생각이 마침내 '시간이 흐른다'는 착각을 부르면서, 이른바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환상(幻想)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이 세상이구요. 이렇게 '존재'에 미혹한 마음은 '진실'을 등지고 마냥 '미혹한 세계'(迷界)를 헤매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이 세상으로 드러난 갖가지 모습들에 대해 미세하게 파헤쳐 보는 것 모두가 꿈속처럼 허망한 것이어서 전혀 집착할 게 못 된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밝힘으로써, 끝내 분별하는 '마음'을 돌이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보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옛 습관이 도져서, '현상으로 드러난 모든 것'을 들추고 따지고 하는 데만 골몰해서, 다시 깊은 '지견의 수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명심할 일입니다. 만약 눈앞에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있음'을 본다면, 졸지에 온갖 허깨비들이 여러분을 홀려서 온갖 허깨비의 감옥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릴 겁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게 나타나더라도 속지 마세요. 그게 모두 여러분이 스스로 지어내는 '마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현정선원, 대우거사,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