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사는 삶의 현장에 사는 주체인 사람이 없다니, ···
어쩌다 출근 시간에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파묻혀서 떠밀리다시피 걸어가다 보면, 후끈하게 다가오는 열기와 함께, 이 많은 사람들은 왜 이토록 바삐 허둥대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새삼 '산다'는 말의 의미가 무언지 되새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산다는 게 과연 뭘까?」매일같이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하는 따분하고 참으로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하루를 반복하면서도, 그래도 꾹 참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게 인생이라면,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거라면, 속시원한 해답도 있어 보이지 않는 생각이 이렇게 마구 치닫다 보면, 참 숨막힐 듯한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이렇게 쫓기면서 살다보니 자신의 사는 모습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게 살더라도 잠시 한숨 돌려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내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어떨까요? 숙명과도 같아 보
이는 무거운 짊을 잔뜩 짊어진 채, 허덕허덕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얼굴을 들고 주위도 한번 둘러보세
요.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기만 하고, 이른바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무한경쟁 시대에 내몰리고 있는 사
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해 보입니까?
일전에 어떤 사람이 우리 홈페이지에 아래 질문을 올린 걸 봤어요. 「하나 있는 자식은 장애아고, 아내는 가출하고, 자
신은 실직하여 병까지 얻어서 당장 살 길이 막막한, 이런 사람이 옆에 있는데, 이것도 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다분히 항의조의 질문을 해 온 거예요. 이런 경우 그 사람을 보고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게 다
꿈 허깨비 같은 거라오」라고 말했다간 아마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일 거예요.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진실(眞實)'을 직시(直視)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사람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
실세상의 고통을 현실적으로 해결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설사 그들의 고달픈 삶을 추스르는 데 힘을 보
태 주고, 또 당장에 급한 대로 돈으로 그 고통을 해소해 준다고 한들, 그건 임시 방편일 뿐이고,그게 어디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겠어요? 내가 하는 말은 모든 구제활동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임시 방편 말고 '영원한 구원의 길'은 없을까? 사람들에게 다시는 이런 고통이 되풀이되는 일이 영원히 없는 진정한 구
원의 길'은 없을까 하고 염원하는 겁니다. 빈곤과 병고의 질곡에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실상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인류 역사와 출발을 함께 하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은 게 아니겠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이나 병고로부
터의 구제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가난이나 병고로부터의 구제 그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또 그런 현실을 지켜보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 없어서, 자
신의 무력함에 그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는 아픈 가슴, 이런 모든 현실적인 고통이 다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실체가 없
는 허망한 것이어서, 전혀 실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일이야말로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정말 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죠.
그럼에도 오직 현실적인 고통이 다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어서, 전혀 실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일 이 길만이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저는 지금 현실적인 구
원활동의 무용론을 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런 임시 방편만 갖고는 결코 인류의 숙명적인 고통은 해소될 수 없다
는 걸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어렵고도 험난한 길을 몸소 가겠다고 나선 게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여러 도반들입니다.
이건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세상의 상식(常識)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길이니까요.
무척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그런데 열심히 사는 데 '삶의 체', 즉 '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니, 이런 말이 과연 믿깁니까? 모든 의심들을 말끔히 해소하는 길만이 범부의 탈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 입니다. 범부의 탈이 이 유정(有情, 생각이 있는 존재)이건 무정(無情, 생각이 없는 존재)이건 간에, '작용의 주체'는 본래부터 없습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작용'이 저 혼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어요?
'불'이 '마른 풀'을 태우는 것이 아니고, ·불이나 마른 풀이나 다만 '한 생각'의 인연(因緣) 따라 투영되는 꿈 허깨비 같은
실체가 없는 환상, 허상임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불'도 '마른 풀'도 '불타는 일'도 모두가 '자
체의 성품(自性)'이 없는, 마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의 망령된 생각이 불,
마른 풀, 불타는 일이라는 실체가 없는 개념(槪念)들을 서로 그럴싸하게 연관지어서 「'불'이 '마른 풀'을 '태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연법(因緣法,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들)'이 행해질 때, 그 가운데는 실(實)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중에서 '인연(因緣 : 직접원인 + 간접원인/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
까? 그렇다면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 변해가는 것들인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도 세상 속 모든 것들도 전부 다 ,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겁니다. 사람들의 지혜(智慧)가 이같은 경지에
이르러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이 세상을 단숨에 단숨에 끊어버려야만 대인(大人), 자유인(自由人)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어요. 대인 자유인의 경지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내가 사는 세상은 평안합니다」라고
한 경지입니다.
정리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존재들, 현상들)은 인연(因緣)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들로서 실체가 없는 꿈, 허
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작용의 주체' '작용'이 없다는 겁니다. 바다에 출렁이는 물결이 물결의 필
요에 의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물결치는 건 아니잖습니까? 다만 바람이 불기 때문에 물결이 일어나 출렁거리는 것일 뿐
이지요. 물론 '바다' 자체도 스스로는 작용이 없구요. 그러니까 다만 바람이라는 인연(因緣) 따라서 바다의 겉모습이 물
결치는 모습을 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겁니다. ···
물결이 일어나긴 일어났지요. 그러나 바다에 물결이 사납게 출렁일 때나, 잠잠할 때나 '바다' 자체는 시작도 끝도 없고,
온적도 간 적도 없고, 생겨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고, 많아지거나 감소거나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출렁이는 '물결의
모양과 같은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볼 때 실체가 없는 '빈~것'인 줄로 보라는 겁니다. 즉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일어
난 적이 없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실체가 없는 허망한 생각으로 일으킨 것들이 바로 지금 여기,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존재들, 현상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든 것들의 실상'(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따라서 '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실상'(實相)이란 곧, '상'(相)이 없는 게 '실상(진실한 모습)'입니다.
즉 아무 일도, 아무것도 일어나고 사라진 적이 없는 가운데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생멸하는 모습'을 실제라고 인정하
여 취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실제로 실재하는 것으로 삼고, 다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여 「'사람'이 걸어간다」,「'불'이 마른 풀을 불태운다」는 식으로 헤아리고 또 말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
들의 분별심(分別心)이 지어내는 실체가 없는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허망한 세상인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실체가 없는 생각이 허망하게 그려낸 허상(虛像)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죠.
'보는 놈'(能觀)이 그대로 '보이는 대상'(所觀)입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이 그대로 '법(法/이 세
상 모든 것들)'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겁니다. '마음'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지어내는 게 아니고, '마음'이 그대로 '이 세
상 모든 것들'인 거예요. '법/法/이세상 모든 것들)'이 그대로 '마음'인 거구요. 불성(佛性), 법성(法性), 심성(心性), 진
성(眞性), 진심(眞心), 불심(佛心), 부처(佛), 본래면목, 주인공, 본래의 나, 등의 방편상의 여러 이름들이 있지만, 이같은
방편상의 이름들은 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빗대어 서로 다르게 부른 것일 뿐 실은 본래 정해진 성품도 모습도 이름도
없는 '이것'을 가리키는 실체가 아닌 방편의 이름일 뿐입니다.
「'마음'을 깨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안다」고 했던 말은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이 그대로 '법(法/이 세
상 모든 것들)'이라는 말을 바꿔 한 말인거예요. '마음'을 떠나서는 달리 구해야 할 '법'도 없고, 알아야 할 '법'도 없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티끌먼지만한 한 것이라도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잘못된 길에 떨어진 것임을 알
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마음'을 깨치고 나면 내도(內道/바른 길) · 외도(外道/잘못된 길)의 분별 구별인들 어
디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마음' 가운데로 녹아 다하는 겁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구성 원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모두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다」
는 말도 군더더기 말이 아니겠어요? 여기서 새삼 주의해야 할 점은 '마음'이 '괴로움'을 지어내는 게 아니고, '마음'이 그
대로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중생의 마음이 너무나 절실하고 다급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괴로움'은 그대 '마음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일 뿐이요, 따라서 현재에 당장 괴로울 때에도 그대 '마음'
은 결코 '괴로움'이 아니니라」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비록 방편(方便)의 말이긴 하나, 이 말엔 허물이 없습니다. '그
림자'와 '거울'이 어찌 서로 다른 것이겠어요? 그러나 '마음'이 밝혀지는 마당에서야 그 어디에 '마음' '괴로움' 두 법이
붙을 여지가 있겠습니까? '마음', '괴로움', '마음거울', '나타남', '사라짐' 등, 이 모두가 오직 실체가 없는 '빈 말'일 뿐
이요, 단숨에 몽땅 '허공꽃'(공화/空華)으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바람으로 말미암아 '바다'에 '물결'이 일긴 했지만, '
물결'이 어찌 '바다' 아니겠어요?
그러니 '물결'을 제외하고 '바다'를 얻으려고 한다면 바다를 얻을 수 없는 일이죠. 따라서 '마음뿐'(唯心)인 이치를 몰록
깨달은 사람이라면 헛되이 '괴로움이 없는 자리'를 구하거나, '괴로움 없는 자리'를 증득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걸 알
아야 합니다. '고'(苦) '낙'(樂), '생(生) 사(死),' 등의 모든 이름 관념 개념이 다 실체가 없는 '빈 이름'일 뿐입니다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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