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 - 어수
영성일기. 2020.10. 20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빈 들판이 되어가는 들길 따라 들꽃이 피어있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존재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소리높여 외친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들 가을이 깊어간다.
“오메 단풍 들것네” 순간 떠오르는 어느 시인의 시구다.
이제는 지는 꽃도 아름답다. 언제나 떠나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한다.
눈물도 없는 냇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씨도 눈부시다. 그 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단감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시간이 흘러간 흔적에 꽃이 진 자리에 씨앗만 남는다. 그 자리에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가 가을
사랑이 된다.
맑은 바람 속 푸른 하늘 가을 산책을 가노라면 가을 하늘이 보인다.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보고 싶은, 풍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먼 가을 하늘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고
싶고, 가을에는 사랑하고 싶고, 가을에는 홀로 있고 싶어진다.
또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올해는 겨울도 일찍 오려는지 단풍이 드는가 싶더니 금방 나뭇
잎이 흙빛으로 변해 떨어진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는 일이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빈 가지를 바라보고 있는 나무의 심정과 같다.
그 많은 것을 싸안고 시간은 흐른다. 세월의 강물은 영광도 고통도 상처도 기쁨의 순간도 다 물줄기에
싸안아 하류로 흘러 보낸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매순간 그것
때문에 속을 끓이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열광하기도 했는데, 그 순간들도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드넓은 바다의 표면 위에 일어났다 꺼지는 잔물결일 뿐인 인생을 살고 있다. 잠시 춤추고 뛰놀며 노래한
뒤, 한 없이 넓은 ‘살아 있음’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다.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가을은
삶에 닿을 수 없고 삶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준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삶’을, '인생을', '현실세상을' 지금 여기서 드러
나는 모든 것의 단순하고도 명백한 모습을,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모습들, 들리는 소리들, 코에 와
닿는 냄새들을, 모든 것의 배후에 있고,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 넣고,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것 자체인
살아 있음 '이것', 오직 '이것', 언제나 '이것', 영원히 '이것'을 알게 깨우쳐주는 계절이 가을이다.
존재 그 너머의 분리되어 있고 고정된 개인의 부재를 모든 것을 담고 있고 어느 것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무한대로 드넓은 열려 있음을 알려 준다. 마침내 완벽한 현존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삶의 한가운
데에 있는 경이로운 부재를 알려준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엄숙한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한밤중에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두고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까닭 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
이다. 내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 이 순간 걷고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또
다른 환자들 덕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배고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 주리고 목마른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잊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지 말기를, 내가 울고, 내가 굶주리고, 내가 슬퍼
하고, 내가 병으로 십자가를 지고 신음하면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 곁에서 계심을
믿는다.
“슬퍼하지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굶고 너와 함께 고통 받고 너와 함께 신음하고
있다. 하늘나라가 너의 것이다.”
영적인 깨어남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영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가을에 누리는 영적인 기쁨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절대 자유를
확인해 본다. 빈들판에서 보는 부재의 현존을 노래해 본다. 가을을 보는 자와 가을이 따로 있지 않는
한생명의 축제를 즐긴다.
'삶의 향기 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는 부처(붓다, 깨달은 자) (0) | 2020.10.26 |
---|---|
말하는 것이 그대로 무한한 도(道)다 (0) | 2020.10.25 |
자각의 인간 (0) | 2020.10.21 |
그림자 때문에 싸운 부부 (0) | 2020.10.19 |
아, 나훈아형! 아, 테스형! (0) | 20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