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병이 치유되면 내가 변하고 세상도 바뀐다

장백산-1 2021. 1. 12. 17:46

마음의 병이 치유되면 내가 변하고 세상도 바뀐다   / 법륜스님

 
불교에서 가장 핵심인 목표(目標)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삼보(부처, 가르침, 스님)에 귀의한 가장 핵심
목표(目標)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니르바나, 열반(涅槃)이 핵심 목표입니다. 니르바나, 열반(涅槃)을
다른 말로 하면 해탈(解脫)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불자들이 열반(니르바나, 해탈)을 생의 목표로 삼아
살고 있습니까. 열반(涅槃)은 괴로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疾病)의 핵심은 무슨 병입니까. 괴로움이라는 병(病)입니다.
괴로움이라는 병(病), 즉 마음의 병(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苦/고통/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은 
미움, 슬픔, 분노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열반(涅槃)이란 이런 괴로움들이 모두 없어진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아주 맑고 건강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고 말합니다. 열반의 마음 상태에
서는 미움도, 슬픔도, 분노도, 외로움도, 괴로움도 없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귀찮지도 
않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귀찮으며, 같이 살다 헤어지면 또 외롭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이래도 고(苦)이며 저래도 고(苦)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四聖諦 성스러운 4 가지 진리)가 불교 핵심사상인데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괴로움이라는 마음의 병(病)에 걸린 환자(患者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라는 마음의 병에
걸여있는 환자, 그 환자가 바로 중생(衆生)이지요. 중생은 곧 환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건강할 수 있습니다. 본래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건강했는데 몸을 잘 못
써서 결국은 병이 나지요. 그럼 치유(治癒)가 무엇이냐.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치유(治癒)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상태도 본래 병이 없습니다. 본래 병이 없는데 마음을 잘 못써서 결국 병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본래 있었던 자리
이니까 본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確信)이 있으면 됩니다.

우선 현재 내가 아픈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프다는 것이 고(苦)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먼저 
진찰을 해봐야 합니다. 괴로움(苦)라는 병의 근본을 아는 것이 집(集)입니다. 그리고 이 병은 치료가 
될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이 멸(滅)이지요.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느냐가 도(道)입니다. 고집멸도(苦集
滅道) 이것이 불교의 핵심사상입니다.

 
열반(涅槃)을 목표로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순서를 밟아서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괴로운 마음의 병을 치료해 나가면 누구나 다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습니다. 괴롭다고 하는 
사람들의 병은 거의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등의식이나 피해의식 등은 깨지더라도 이미 그것이 
몸과 마음에 습관이 돼 있어 계속 돌아갑니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반복되지요.

그래서 몰라서 괴로운 게 있고, 알아도 괴로운 마음의 병이 치료가 안 돼 괴로운 게 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뜻대로 치료가 잘 안 되는 경우이지요. 이것이 바로 무의식(無意識)의 세계이며 불교적으로 말하

업식(業識)의 세계입니다. 이런 경우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순간 놓쳤지만 즉각 업식(業識)이

작용을 한 것임을  깨닫고  다시 돌이키면서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반면 괴로운 마음 치료가 절반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말하자면 
정신 자체가 약한 사례입니다. 깨우친다고 해도 우울증은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굉장히 보살
펴야 하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의 병을 치료하신 분입니다. 병의 유형이 어떤 것들인지 
아주 잘 아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병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온갖 경험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서 괴로운 마음의 병, 즉 번뇌(煩惱)는 주로 마왕의 
유혹을 시작으로 등장합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수행할 때 내면에서 어떤 번뇌가 일어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절망적일 때가 있지요. 마왕이 열반이란 없다고 계속해서 속삭이는 순간입니다. 깨달음
은 없다는 것입니다. 몸만 상하고 힘드니 왕궁으로 돌아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축복을 받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유혹합니다. 수행의 마지막 순간에 곳곳에서 번뇌가 나타나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련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사탄의 속삭임을 한 마디로 잘라 버렸습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대결정심(大決定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깨닫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決心)했던 
것처럼 죽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 어려움을 많이 느끼셨습니다. 처음 길을 나선 사람은 길의 끝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습니다. 허나 뒤 따라가는 사람은 쉽지요. 이미 누군가가 가본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셨습니다. 수행에는 애씀이 따로 필요 없어 그래서 부처님은 남을 치료한
다는 교화라는 측면에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길 끝에 서서 깨닫고 보니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을 돌아봅시다. 우리들의 믿음은 사실 보잘 것 없습니다. 믿어야지 하고 하는 말은 이미 믿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줘야지 하고 하는 말은 주기 싫다는 말이지요. 본질을 꿰뚫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개에게 뻒다귀를 던져주면 개는 뼊다귀를 좇아가지만 사자에게 뼊다귀를 던져주면
사자는 뼊다귀를 좇아가지 않고 사람을 물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자가 사람을 물어버리면 사자의
굶주림은 한 방에 끝나지요.

아침에 알람이 울리는 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대부분 못 일어납니다. 원인이 몸에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본질은 일어나기 싫은 겁니다. 몸이 피곤해서라는 핑계는 현상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일 뿐입
니다.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냥 일어나세요. 30분 동안 일어나야지 하면서 
번뇌에 얽매이는 것이 이익입니까, 자버리는 것이 이익입니까. 번뇌만 일으키고 잠도 못자고 시간만 
보내면 손해 아닙니까.. 그러나 자는 것도 방법이나 여기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지각이나 야단 등 
과보가 싫으면 그냥 일어나세요. 일어나려는 노력은 하지마세요. 노력한다는 말은 이미 싫음에 사로잡힌 
상태를 일컫습니다.

수행에서는 애씀이 없습니다.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냥 벌떡 일어나세요. 집착심을 그냥 
탁 놓으란 말입니다.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번뇌인 줄 알고 그냥 
탁 놓으세요. 부처님 말씀에 자신이 깨쳐야 부처님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부처의 본질을 터치하게 해 
줍니다. 부처님이 말했으니까 옳다라고 여기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자신이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가 수행을 하다가 브라만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
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브라만은 “이 강은 성스러운 강이기 때문에 목욕을 하면 업(業)이 씻겨 
나가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브라만이 하는 이 말에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는 
궁금했습니다. 브라만이 하는 말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고,
그 풍습은 사실 오래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극락(極樂)에 가는 것이 이렇게 쉬운데 왜 부처님은 고된 
수행을 하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었겠죠.

그래서 그 제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브라만이 하는
말이 맞다면 그 강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극락(極樂)에 갈 것이다.”라고. 제자의 번뇌는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쓸데없는 소리에 신경쓰지 말고 수행이나 하라고 했으면 제자는 그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번뇌를 뿌리 채 뽑아 버리는 겁니다. 슬픔은 슬픔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뭔가에 사로잡혀서 생긴 일입니다. 분노, 원망, 미움도 마찬가집니다.

 
제게 어떤 노처녀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무슨 일입니까.”  “전철에서 
모르는 어떤 남자가 제 엉덩이를 만졌어요. 화가 너무 납니다. 그런 사람을 그냥 둬도 괜찮나요? 바로
잡아야 하잖아요.”

“그 남자에게 돈은 주었나요?”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공짜로 지압을 받았으면 좋은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사람 그냥 둬도 괜찮아요? 바로잡아야 하잖아요.” “내일부터 송곳하나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송곳으로 콕 질러버리세요.” “그러면 욕 얻어먹잖아요.” “세상을 바꾸
려면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뺨 맞잖아요.” “세상을 바꾸려면 뺨 맞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치료비는요.” “세상을 바꾸려면 치료비를 물어주는 돈 드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입
니다. 그 정도는 기꺼이 희생을 해야 해요. 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도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데서 의식이 바뀌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자신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관심
으로 번집니다. 변화가 오게 되면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북한 동포 돕기도 하고 보시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괴로운 마음의 병을 치유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주위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많은 중생들을 열반, 해탈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변화가 주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