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를 경험하는 두 가지 방법
진리(眞理)를 경험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논리적(論理的)인 면(面)만 강조해서 마음이 어떤 논쟁(論爭)에 동의(同意)할 때이다. 이같은 진리(眞理)에 대한 경험 방법은 좀 더 정교하고 예리한 또 다른 논쟁이 처음 논쟁을 무너뜨리고 동의는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인위적(人爲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대가 진리(眞理)라고 믿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진리(眞理)가 아니게 된다.
두 번째의 진리(眞理)를 경험하는 방법는 완전히 다르다. 이 방법은 논리적(論理的)인 논쟁도 아니고, 지적(知的)인 논쟁도 아니고, 합리적(合理的)인 논쟁도 아니다. 갑자기 그대 안에서 ‘이것'은 나의 진리(眞理)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깨어나고 도전을 받았다.’라는 인식(認識)이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내면에서 일어난 그같은 인식(認識)은 그대에 대한 동의(同意)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진리(眞理)가 된다. 어떤 논쟁도 그대 자신의 진리(眞理)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어떤 논쟁도 그대 자신의 진리(眞理)를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논리도 그대 자신의 진리(眞理)에 흔적을 남길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論理)가 그대 자신의 진리(眞理)를 발견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내가 벽에 대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내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몇몇 사람이 내 강의를 들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편견과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존재계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수많은 믿음들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내가 하는 강의는 집단적인 믿음, 집단적인 생각, 집단적인 종교, 집단적인 철학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그같은 사람들이 그대에게 보고할 때에도 그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가 왜곡되고, 내용이 빠지거나 덧붙여지고,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색채와 의미를 얻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하는 강의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는다 하더라도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낳을 뿐이다.
타인이 하는 말에 경청(傾聽)을 하려면 고요해지고,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자신의 분별하는 생각을 모든 쓰레기들과 함께 한쪽으로 치워두는 원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경청(傾聽)을 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眞理)라면 그대의 가슴속에 종소리가 울릴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眞理)가 아니라면 그대의 가슴 속에 종소리가 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마음을 통한 앎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 알게 되는 앎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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