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나는 어디에도 없다. 무아(無我)다.

장백산-1 2021. 2. 27. 15:00

나는 어디에도 없다. 무아(無我)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무아/無我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무아/無我입니다).

'나'가 없는 이유는 '나' 홀로 만들어진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며, '나' 스스로 배워 익힌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몸도 내가 아니며, 마음 생각 또한 내가 아닙니다. 몸 부모님을 의지해 생겨난 것이며, 마음이나 생각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온 모든 환경들로부터 배우고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합니다.

어느 것 하나 내 스스로 독자적으로 만든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내 스스로 독자적으로 만든 것은 결코 찾을 길이 없습니다.

몸은 내 스스로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또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4대 원소 또한 우주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잠시 인연(因緣)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먹는 쌀이 있습니다. 분명 쌀과 나는 별개입니다. 그러나 쌀에 물(수)과 열(화)의 인연(因緣)을 지어주고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나면 밥은 더이상 밥이 아닌 '나'가 됩니다. 밥이 소화가 되서 내 살이 되고 내 뼈가 되어 내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물도 우리가 마시고 나면 '내 몸'이 되고, 과일도 먹고나면 '나' '내몸'으로 변하게 되며, 공기도 들이마시고 나면 내 호흡이 되어 폐에서 적혈구와 결합되어 몸의 각 세포로 이동되어 영양분을 태워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본래부터 나였던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잠시 인연(因緣)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을 지어붙여 집착(執着)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에 우리의 몸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까지 지금의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의 나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는 변화(變化)합니다. 내 몸의 살점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이 잘렸다면 그 잘린 손가락을 보고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잘린 손가락이 내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몸에서는 한치라도 '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 내 생각, 내 가치관들이 '나'일까요? 내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내 생각이며, 내 가치관이며, 내 선악관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배운 말이거나, 지금까지 살아오며 환경에 의해 익혀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가정, 환경, 학교, 사회, 역사, 책, 사람들...이 모든 주변 일체의 환경에 의해 내 마음, 내 생각, 내 가치관이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생각을 꺼내어 보십시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말을 꺼내어 보고,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일으켜 보십시오. 입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익혀온 말을 하고 익혀온 생각, 생각의 조각을 짜맞추는데 머리를 굴리게 됩니다.

익혀온 관습, 익혀온 생각, 익혀온 가치관, 익혀온 선악관, 익혀온 고정관념들이 우리들의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혀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자라고 익혀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마다 제각각 그 나름대로의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주워담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성격이나 몸매의 좋고 나쁨, 유식함과 무식함, 능력의 많고 적음, 근기의 우열...등등의 모든 분별들은 본래 있지도 않습니다. 본래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온 천지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통 속에 주워담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고 하는 통 속에 주워담아서 좋으니 나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크니 작으니, 똑똑하니 어리석으니... 숯한 분별(分別)하는 마음 분별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와같은 분별(分別) 속에 우리네 중생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분별심(分別心) 그 놈만 놓아버리면,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만 없어지면 세상이 온통 환히 밝아지는 줄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렇게 사람들 마다 제 스스로 '만큼의 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바깥 세상을 탓하고 삽니다. 그러니 본래 '내 생각' '내 마음' 또한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격(性格)이 나인가요? 성격 또한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해갈 것입니다. 지금의 성격이 '나'인 것 또한 아닙니다.

 

자 그러면 과연 무엇을 보고 '나'라고 하는 이름을 지어 붙이시겠습니까? 어디에서 '나'를 찾으실건가요?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애시당초부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여기 수레가 있습니다. 수레에 달린 바퀴가 수레인가요? 바퀴를 지탱하는 바퀴살이 수레인가요? 손잡이가 수레입니까? 수레는 어디에도 없지만 인연(因緣) 따라 잠시 수레라는 이름이 붙은 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수레라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인연(因緣)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에 숱한 분별(分別)을 지어 형상화 하고, 상(相)을 지어 '나'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거짓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봅시다. 제 스스로 '거짓 나'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짓 나의 인연(因緣) 놀음에 울고 웃고 하기를 숱하게 반복하며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디에 '나'를 붙이시겠습니까? 무엇을 '나'라고 하시겠습니까? '나'가 본래 없을진데 무엇을 괴로워하며 무엇을 행복해 하시겠습니까? '나' 없는 자리에 그 어떤 깨달음을 붙일 것입니까?

'나 없음'이 그대로 깨달음인 것을... 

- 2009.01.13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