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매 순간 순간이 새로운 세상이다.

장백산-1 2021. 3. 3. 11:49

매 순간 순간이 새로운 세상이다.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만행(卍行)을 할 때가 있다. 늘상 반복되던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그간살아온 삶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조(觀照)해 보면 반복되는 삶과 그 삶의 진부함이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음을 깨우치게 된다. 그래서 만행길이나 여행길에서는 그간 내가 갇혀 있던 어떤 틀을 보게도 되고,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색안경이나 편견 없이 나 자신을 살펴보는 지혜(智慧)를 문득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살펴보는 지혜(智慧)를 깨닫기 위해 굳이 짐을 챙겨 여행길에 나설 필요는 없다.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새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 그동안은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의 틀 속에서, 똑같이 일상을 반복하며 똑같은 틀에 박힌 삶을 살다보니 삶이 늘 그렇고 그랬던것 같았지만, 스스로 갇혀있는 생각의 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틀 속에서도 자유(自由)로울 수 있다면 삶은 나날이 새로울 수 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여행길 만행길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정된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어떤 생각, 어떤 사고의 틀, 어떤 고정관념, 어떤 한정 등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해 있는가를 보지 못하면 어지간해서 새로운 변화(變化)를 맞이할 수 없다. 사실 이 세상은 매 순간 순간이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다. 어느 한 순간도 새롭지 않은 순간이 없고, 어느 한 순간도 경이에 찬 순간이 아닌 순간이 없다. 그러나 세상이 늘 그렇고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내 마음이 늘 그렇고 그렇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어떤 한 가지에 마음에 머물러 집착(執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떤 생각의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自由)로울 수 있다면 매 순간 전혀 새로운 경이로운 세상에 눈뜰 수 있다.

옛 말에 한 번 목욕한 강물에 다시 목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목욕을 했던 그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지금은 전혀 새로운 강물이다. 이처럼 전혀 새로운 강물만이 매 순간 순간 우리 앞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에 있던 강물이라는 생각의 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강물이 그 강물일 뿐이고 매번 보는 강물이 다 같은 것일 뿐이지 전혀 새로운 강물일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강물 탓이 아니라 내 고정화된 생각 탓이다. 강물은 늘 새로운데 내 생각이 고정된 틀에 박힌 것이다. 처음 강물에 몸을 담그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전혀 새로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현재(現在)에 생경하게 몸을 담그어 보라. 그랬을 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도 전혀 새로운 삶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일상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고정된 생각의 틀은 의외로 깊고도 강하다. 어느 하나를 옳다고 생각하면 그 옳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어렵고, 어느 한 가지를 틀렸다고 생각하면 그 틀렸다는 생각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錯覺)은 ‘내 생각이 맞다’고 고정 짓는 것이라고 한다. ‘내 생각’ ‘내 견해’ ‘내 사상’만 옳다보면 다른 사람의 생각 견해 사상은 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생각 너의 생각을 옳고 그르게 둘로 나누어 버리면 그같은 구분(區分)과 분별(分別)에서 모든 다툼과 시비와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고 나아가 그같은 구분(區分)과 분별(分別), 나뉨이 국가간의 문제가 되면 전쟁(戰爭)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늘 어떤 한 가지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고 있으면 늘 그것만을 고집해서 새로운 어떤 것을 선택하지 못한다. 아니 새로운 다른 것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갈 때도 바다가 좋은 사람은 늘 바다만 찾고, 산이 좋은 사람은 늘 산만 찾는다. 그러다 보니 산이 좋은 사람은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안타깝고 이해가 안 된다고 여기며, 또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꺼 뭣하러 올라가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두 생각이 서로 담을 쌓고 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의 생각에도 시선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 직장을 구할 때라도 미리 스스로 한계나 적성 같은 것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직장을 찾으며, 취미 생활도 기존에 스스로 정해 놓은 취미만 찾지 내 생각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지 못한다. 그 뿐인가. 생각이 딱 틀에 박혀 있으면 서점엘 가도 늘 똑같은 종류의 책만 고르게 되고, 사람을 만나도 꼭 내 뜻에 맞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음식을 먹어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게 되며, 어디를 가더라도 늘 가는 곳만 가게 된다. 대학시절 강의를 들을 때도 보면 매일 앉는 자리만 앉게 되지 않는가. 앞에 앉는 사람은 매 시간 앞 자리를 차지하지만 뒤에 앉는 사람은 좀처럼 앞자리에 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것이 다 생각의 틀에 갇힌 탓이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 제 스스로 자신의 적성, 취미, 재능, 능력, 사상, 종교 등의 틀을 다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살려고 하지, 그 울타리를 치워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의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찾더라도 그것은 고작해야 그 틀 안에서의 새로움일 뿐이다.

내 생각이 어딘가에 매여 있지 않고 좀 더 자유롭고 새로울 수 있다면 또 다른 새롭고 신비로운 세상은 항상 우리 곁에서 기다리고 있다. 생각의 틀을 치워 버리면 끝없는 자유(自由)와 확 터진 넓은 세상을 만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제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늘 마음은 자유(自由)를 원하고, 내 삶의 새로운 어떤 변화(變化)를 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인가.

직장 생활도 지긋지긋하고, 돈 버는 일도 지겹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먼저 이 질문에 답해 보자. ‘지금 출가를 할 수 있는가’ ‘지금 성직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출가를 하기에는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가족도 지켜야 하고, 벌어 놓은 돈도 지켜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수많은 이유로 출가는 내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보라. 왜 출가는 남의 이야기 이기만 해야 하는가. 나에게도 언제나 출가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그 가능성을 닫지 말라. 출가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 ‘난 출가는 못해’ 하는 그 생각의 틀에 갇히지 말라는 말이다. 그 어떤 생각, 그 어떤 견해에서도 자유(自由)로워 지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출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생각 돌이켰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그렇게 바라던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출가를 하면 돈을 안 벌어도 되고, 매일 반복되는 다람쥐 체바퀴 돌리는 직장생활을 안해고 되고, 그간의 삶에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으로의 전환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바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출가는 못 한다고 할 것이다. 바로 그 ‘한 생각’, 틀에 갇힌 한 생각이 나의 자유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변화(變化)를 원하고, 자유(自由)를 원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원하고 있다면 내 고정관념(固定觀念)의 틀, 울타리를 먼저 치워버리면 된다. 내 앞에 있는 온갖 한정된 관념들을 던져 버리면 된다. '나' 앞에 그 어떤 다른 수식을 가져다 붙이지 않을 수록 그만큼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 어디 어느 대학을 나온 나, 성격이 어떠한 나, 능력이며 적성이 어떠한 나, 바다를 좋아하는 나, 어떤 종교를 믿는 나,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 나 등 수많은 우리 안의 한정 된 '나'가 자유로운 나를 옭아매고 있다. '어떠 어떠한 나'가 아니라 그 앞자리 한정개념을 비워 두어 보자. 그러면 그 자리에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나' 앞에 어떤 한정개념이 오더라도 우린 그것을 다 인정할 수 있고 그것 자체가 될 수 있다. ‘어떠 어떠한 나’를 버리면,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다시 돌이켜 ‘어떤 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어느 종교의 신자라는 나’라고 하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불경도, 성경도, 노덕경도, 인디언 원주민들의 책들도, 또 그 어떤 가르침도 자유롭게 공부 할 수 있으며, ‘어떤 직업을 가진 나’라는 생각의 틀을 벗어버리면 전혀 새로운 직업의 가능성이 열리고,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춘 배우자’를 찾겠다는 생각의 틀을 던져버리면 더 넓은 시선으로 배우자를 찾을 수 있으며, ‘어떤 지위, 어떤 계급, 어떤 조건의 나’라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면 그 어떤 지위도 조건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활짝 열린 가능성을 수용하며 살 수 있다. 새로운 변화(變化)를 바란다면, 무언가 새로운 삶의 전환(轉換)을 원한다면 당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변화는 언제나 밖으로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 안의 그 어떤 정해진 생각의 틀만 깨버리면 새로운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있다.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버리고, 고정된 생각의 틀을 버리고 텅~빈 시선으로 전혀 새로운 이 세상을 바라보라.

텅 빈 시선으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우린 세상을 상대로 그 어떤 시비나 분별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새롭고 경외에 넘치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어제나 그제, 혹은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이만큼의 세월 동안 내가 살아왔던 모습으로써 오늘을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일은, 아니 조금 전의 일까지라도 모두 비워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으로써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야생적이며 자연적인 것들에게서는 똑같은 것을 찾을 수 없다. 진리(眞理)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서 똑같은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같은 꽃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꽃은 없으며, 같은 기후조건에서 자란 나무들 또한 똑같은 나무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시공을 통털어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삶,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어제의 하늘은 어제의 하늘일 뿐 오늘의 하늘은 전혀 다른 새로운 다른 하늘이다. 어제의 나무며 들꽃들과 오늘의 나무며 들꽃은 같지 않다. 전혀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있다. 날마다, 아니 매 순간순간 전혀 새로운 찰나 찰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이 이 세상 본래(本來) 모습이자 진리(眞理) 본연(本然)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진리 본연의 모습을 따라야 하고, 그것은 바로 매 순간순간을 전혀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은 이들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어제의 생각으로 오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제의 편견을 오늘까지 가져오지 말라. 어제의 생각으로 오늘을 판단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만들어진 선입견으로 지금 이 순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듯 전혀 새로운 텅 빈 시선으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을 볼 때, 어떤 것을 배울 때, 혹은 진리를 공부할 때, 과거에 배웠고 익혔던 그것들을 갖고 듣고자 한다면 점점 더 진리(眞理)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진리(眞理)를 알고자 한다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법문을 들을 때도 혹은 책을 읽을 때도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편견으로써 걸러 보며, 자신의 견해와 합당하는 것들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랬을 때는 천 권의 책을 읽었더라도 읽은 것이 아니며, 천 권의 책을 읽은 것은 다만 내 안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강화시킨 것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이 세상은 찰나찰나가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내 눈에 보여 지는 모든 대상들은 내가 처음 보는 것들이다. 눈이 내려도 항상 첫 눈이며, 사랑도 항상 첫 사랑일 뿐이고, 바람이 불더라도 항상 첫 바람일 뿐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늘 해왔하던 일이라도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그 일을 시작해 보라. 어린 아이가 되어 숲길을 거닐어 보라. 처음 보는 듯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라. 평소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때 매 순간순간은 기적과도 같은 진리의 순간이 될 것이다.

-법상스님,[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