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멀쩡히 있는 내가 있는데 왜 내가 없다고 하느냐. - 고우스님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중에 제행무상(諸行無常 : 이 세상 모든 것은 쉬지않고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됩니다. 우리들이 사는 사바세계의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롭고,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변화를 직접 체험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리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은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아(無我)다' 무아(無我)야말로 사람들이 분병하게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나가 멍쩡하게 분명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느냐?'라고 되묻습니다. 사람들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이 말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를 분명하게 깨달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들수 있는데,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아(無我)임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 속의 '나(我)'는 과연 무엇인가? 먼저 아주 깊은 내용보다는 중생의 입장에서 당장 극복해야 할 '나(我)'에 대해 말하면 그 '나(我)'는 이기심(利己心) 분별심(分別心)으로 가득찬 '나(我)'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의 '나(我)는 이기심(利己心)으로 분별심(分別心)으로 움직이는 '나(我)'가 본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계속해서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주관(主觀 : 나라는 생각) 객관(客觀 : 너라는 생각)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이 사라진 자리, 바로 그 자리가 무아(無我)입니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이 사라진 자리, 즉 무아(無我)의 자리 거기에는 '나(我)'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나', 자기중심적인 '나', 분별심으로서의 나가 없습니다. '나'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의 자리이기 때문에 아주 공정(公正)하고 평등(平等)한 마음으로 있을 뿐, 남과 비교(比較)를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我)가 있다(有我)'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기심(利己心) 분별심(分別心)이 작용하여 모든 것을 '나'에 맞게 생각하고 '나' 쪽으로 끌어들여 있는 그대로의 다른 사람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과 계속 비교(比較)하면서 자기 스스로 스스로를 폄하하고 학대합니다. 사실 자신에 대한 학대는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 남이 학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괴로우면 남을 탓하고 주변에 있는 분을 탓합니다. 그리고는 더욱 깊은 괴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눈을 활짝 뜨십시오. 우리의 본래 모습, 이 세상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은 무아(無我)입니다. '나(我)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 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저 하늘에 떠있는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듯이,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이 무아(無我)임을 아는 것과 동시에 굉장한 지혜(智慧)가 발동이 됩니다. 아울러 그 지혜 속에서 '나'를 가장 잘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며, 남과 더불어 반목과 갈등 없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짚과 짚으로 꼬은 새끼줄'을 예로 들면 사람들은 새끼줄을 '나'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끼줄에 집착하듯이, '나가 있다'는 생각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끼줄이 아닙니다. 새끼줄을 만들어 낸 것은 짚입니다. 무아(無我)입니다. '나가 있다'는 생각, '새끼줄이 나'라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고 착각이요, 허구입니다. 착각이요 허구이기 때문에 그 '나'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집니다. 그러므로 착각을 깨고 집착을 깨고 우리의 존재원리 그대로 새끼줄과 짚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허망함과 무상함이 아니라 정말로 밝은 지혜가 나와 자주적이고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 이 세상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이 무아(無我)임을 알고 사는것이야말로 자기를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이요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래 모습, 이 세상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이 무아(無我)임을 알고 살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남을 돕는 것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 이 세상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남과 나를 함께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서로가 돕고 서로서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세계입니다. 만약 가정이나 사회가 이렇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세계가 되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불국토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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