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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심(三毒心)의 소멸이 곧 해탈이자 열반이다. - 삼법인 강의(14), 법상스님

장백산-1 2021. 5. 31. 12:46

삼독심(三毒心)의 소멸이 곧 해탈이자 열반이다.  - 삼법인 강의(14), 법상스님

일체개고(一切皆苦)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관계

이상에서 삼법인(무상, 무아 고)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존재에 대한, 나아가 이 우주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이요 특성임을 알았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理致)를 벗어나는 것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야말로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은 ‘법의 도장’, ‘진리의 도장’, 법인(法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삼법인에서 제외시키는 경우는 없지만, 세 번째 법인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는 엇갈리곤 한다. 많은 책들이나 스님이나 교수님들께서도 삼법인을 설할 때 때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또 때로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맞는가. 보통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자니 일체개고(一切皆苦) 또한 빠질 수 없는 법인이라 삼법인을 넘어 사법인(四法印)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두 가지, 열반적정과 일체개고는 어떤 관계인가? 결론을 말하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라는 두 법인에 대한 깨달음과 통찰의 유무에 의해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법인인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에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과 통찰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도 있다. 다시말해 무상과 무아라는 법인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 법인이 나뉜다. 무상과 무아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모든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렇듯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이 세상이 곧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안 사람은 더 이상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하지 않고(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란(무아)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속박, 구속, 번뇌, 집착,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바로 이렇게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모든 욕망과 번뇌, 구속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고요한 적정(寂靜)의 상태를 지칭하는 열반(涅槃)에 다달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안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곧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일체개고(一切皆苦)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서로 다른 특성이라기 보다는, 앞의 두 법인인 무상과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의 유무와 관련된 법인인 것이다.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고,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깨달았을 때 열반적정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지 못한 이에게 이 세상은 일체개고이지만,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면 곧 열반적정의 세상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삼법인만을 설한다면 일체개고보다는 열반적정을 넣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중생세간의 특성만을 살핀다면 일체개고가 들어가야 하겠지만, 세간과 출세간의 특성을 두루 살핀 가르침이라면 마땅히 열반적정이 들어가야 옳을 것이다.


삼독심의 소멸이 곧 해탈이자 열반이다.

열반이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앞서 삼법인은 연기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했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삼법인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했다. 즉 연기되어진 모든 것은 곧 삼법인의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말해 열반이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이면서 동시에 연기법을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와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인연(因緣) 따라 변화하는 비실체적인 것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도 내 밖의 모든 대상들도 모두 텅 비어 있으며, 실체가 없이 인연(因緣)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그것이 실제하는 것처럼 보이고, 항상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장에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살아 숨쉬며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말하는 생생한 ‘나’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아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연기하면서 변화할 뿐. 사실 우리는 ‘나’라는 어떤 고정적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에 집착하고, ‘내 것’에 집착하며, ‘내 생각’에 집착하는 등 끊임없는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라는 상(相)을 내세우고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아상과 아집은 모든 번뇌의 근본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가져온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毒)이 든 마음을 우리에게 가져온다. ‘나’와 ‘내 것’, ‘내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탐욕과 집착이 생겨난다. 내 것을 더 많이 늘리려 하고, 쌓아나가려 하는 탐심이 생겨난다. 또한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하고 싶어하는 생각과 견해에 대한 탐심도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내 생각대로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나에게 누군가가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할 때도 내 안에서는 불길처럼 화가 들끓는다. 이처럼 아상과 아집이 있을 때 우리 안에서는 진심(嗔心)이라는 화와 성냄이 일어난다. 이처럼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데서 아상이 생겨나는데 이렇게 실체적인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나’, ‘내 소유’, ‘내 생각’ 등이 있다고 고집하는 그것이 바로 치심(癡心) 즉 무지(無智)이다.

이렇게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치심이 일어나고 치심은 곧 탐심과 진심을 가져온다. 이렇게 탐진치 삼독심이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난 삼독심은 더욱 더 사람들을 옳아매며, 구속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살펴보라. 탐진치 삼독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문제며, 괴로움이며, 아픔이며, 슬픔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심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그 탐진치 삼독심의 원인은 바로 연기(緣起)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 『상응부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탐심의 소멸, 진심의 소멸, 치심의 소멸,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