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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六根)과 십이처(十二處)의 이해 - 십이처(1)

장백산-1 2021. 6. 12. 16:59

육근(六根)과 십이처(十二處)의 이해 - 십이처(1)

앞서 육근(六根)은 인간의 6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과 그것들의 감각기능, 감각활동이라고 했다. 인간은 육근(六根)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한다. 그런데 감각기능인 육근(六根)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대상인 육경(六境 : 6가지 경계 :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을 인식하다 보니, 사람들은 내 안에 육근(六根)이 진짜로 있는 것 같고, 내 밖에는 육경(六境)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錯覺)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내 안에 육근(六根)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 육경(六境)이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因緣) 따라 육근(六根)이 기능과 활동을 할 뿐이지만 사람들은 육근(六根)의 그러한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하는 존재를 ‘나’라고 잘못 여기고, 육근(六根)의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의 대상(경계)인 육경(六境)을 ‘세상’이라고 잘못 여겨서 분별(分別)을 일삼는 것이다.

이 때, 육근(六根)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착각(錯覺)을 육내입처(六內入處)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하고,  육내입처(六內入處)의 외부 대상을 ‘세계’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錯覺)을 육외입처(六外入處)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한다.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를 합쳐 십이처(十二處)라 한다. 육내입처(六內入處)는 안입처, 이입처, 비입처, 설입처, 신입처, 의입처고, 육외입처(六內入處)는 색입처, 성입처, 향입처, 미입처, 촉입처, 법입처다.

즉 육근(六根)은 인연 따라 우리 안에 생긴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의미하고, 육내입처(六內入處)는 그런 6가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인 육근(六根)을 ‘나’라고 착각(錯覺)하는 어리석은 마음, 의식을 뜻한다. 육근(六根)육경(六境)을 감지하는 것을 보고 내 몸 안에 외부 대상을 감지하는 나라는 것이 실재적으로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마음, 의식이 바로 육내입처(六內入處)다.

단순히 보는 기능과 보는 활동은 안근(眼根)이라 하고, 보는 내가 있어서 외부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을 ‘안입처(眼入處)’라 한다. 단순히 듣는 기능과 듣는 활동은 이근(耳根)이라 하고, 듣는 나라는 것이 있어서 외부의 소리를 든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을 ‘이입처(耳入處)’라 한다. 비근과 비입처, 설근과 설입처, 신근과 신입처, 의근과 의입처도 안근과 안입처, 이근과 이입처와 같다.

남이 내게게 욕을 할 때 이근(耳根)에서는 그냥 소리를 들을 뿐이다. 욕이라는 소리의 인연이 생겨나면 인연 따라 이근(耳根)은 그 소리를 듣는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이라는 소리를 듣는 존재를 ‘나’라고 허망하게 착각(錯覺)하는 순간 남이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어리석은 착각이 생겨나고, 착각(錯覺)이 생겨남에 따라서 남에게 욕을 얻어먹은 ‘나’, 욕설을 듣고 상처받은 ‘나’라는 허망한 관념(觀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 소리를 듣는 ‘나’라는 허망한 '나'라는 관념(觀念)이 생겨날 때 이것을 이것을 가리켜 ‘이입처(耳入處)’라 한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봄으로써 ‘보는 나’라는 허망한 관념이 생겨나고, 들음으로써 ‘듣는 나’가, 냄새 맡음으로써 ‘냄새 맡는 나’, 맛 봄으로써 ‘맛 보는 나’,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접촉하는 나’, ‘감촉을 느끼는 나’, 생각을 함으로써 ‘생각하는 나’가 있다는 허망한 착각(錯覺)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육내입처(六內入處)라 부른다.

이런 허망한 의식, 마음인 육내입처(六內入處)에서부터 나라는 관념, 잘못된 허망한 아상이 생겨난다.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아상(我相) 타파도 이러한 허망한 의식 마음인 육내입처(六內入處)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말에 의해서 내 안에서 생각하는 어떤 존재가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고 허망하게 착각(錯覺)을 함으로써 육내입처(六內入處) 중에서도 의입처(意入處)라는 잘못된 허망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내 안에 생각하는 어떤 것이 실재로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錯覺)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면 육내입처(六內入處)는 인연(因緣) 따라 생긴 허망한 의식이기에 인연(因緣)이 다하면 사라지는 허망한 의식일 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錯覺)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육내입처(六內入處)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있다고 여긴 ‘생각하는 나’는 인연 따라 생겨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으로 실체가 없는 허망한 의입처(意入處)에 불과하다. ‘보는 나’, ‘듣는 나’, ‘냄새맡는 나’, ‘맛보는 나’, ‘촉감을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가 실제로 있다고 착각(錯覺)하는 허망한 의식이 바로 육내입처(六內入處)다.

부처님의 육근은 청정하지만, 중생의 육근은 오염되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육근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허망한 의식이 육내입처(六內入處)이다. 청정과 오염의 차이는 있지만 석가모니 부처든 어리석은 중생이든 육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은 석가모니 부처이든 중생이든 죽을 때까지는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육근(六根)이 수명(壽命)이라는 인연에 의지해 머문다고 한다. 즉 살아있는 동안, 수명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육근(六根)의 활동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사람의 육근(六根 : 눈,귀, 코, 혀, 피부, 마음))은 수명을 인연으로 나타나는 연생법(緣生法)에 불과한 것이다. 연생법(緣生法)이란 인연 따라 생겨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망한 존재를 말한다.

중생에게는 허망한 의식인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있지만, 부처에게는 없다. 육내입처(六內入處)는 육근(六根)의 감각기관이나 감각기능이 아니라 감각기능, 감각활동을 ‘나’라고 착각(錯覺)하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에 나올 12연기에서도 육내입처(六內入處)는 반드시 소멸되어야 할 허망한 의식으로 보고,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소멸하면 나아가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소멸한다고 말한다. 육내입처(六內入處)는 반드시 소멸되어야 할 허망한 의식이지만, 육근(六根)은 잘 지키고 수호하여 청정하게 지켜야 할 감각기관이다.


일체(一切)는 곧 십이입처(十二入處)

석가모니 부처님은 육근(6개의 감각기관)과 육경(6개의 대상경계)을 합친 십이입처(十二入處)를 ‘일체(一切)’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에서는 “일체는 십이입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눈과 모양,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피부와 감촉, 뜻과 법이다. 만일 십이입처를 떠나 일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해 갈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십이입처를 떠난 일체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십이입처(十二入處) 외에 일체(一切)’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이라고 말하거나, 일체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 그 ‘일체’가 바로 십이입처(十二入處)다. 즉 십이입처(十二入處)를 빼고 다른 그 무엇을 일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다섯 가지 감각활동으로 감지되는 대상과 마음으로 지각되는 대상만을 ‘일체(一切)’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냄새, 혀로 맛보아지는 맛, 몸으로 접촉되는 감촉,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들 이외에 다른 것들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인식론(認識論)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지난 밤 뒷산 깊은 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강한 바람과 벼락에 맞아 큰 굉음을 내며 쓰러졌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도 굉음을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사건은 일어난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일까? 불교 인식론인, 일체(一切)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육내입처(六內入處)에서 그 사선을 지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뜻 보면 이것은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理致)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 갔을지라도 사람들마다 보는 것은 다 다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다만 군중만을 볼 뿐, 그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눈 앞에 있을 때 가슴이 두근 두근 뛰며, 그 때부터는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마음속에는 그 사람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존재는 내면에 아무런 파문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고, 흔적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의 눈에는 가시광선만 보이지만,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보는 곤충들은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인간에게는 자외선이나 적외선의 세계는 없는 것이다. 육내입처(六內入處)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매 순간 경험되어지는 것만을, 육내입처(六內入處)로 인식되어지는 것만을 법(존재)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 자체도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겨난 허망한 의식들일 뿐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체(一切)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을 이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마음에서 연기하여 나타난 것을 일체(一切)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기 육내입처(六內入處)로써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세계(六外入處/ 육외입처)를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엄밀히 따져 같을 수가 없다. 모든 외부 대상은 저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지각되는 것이다. 그러니 엄격히 따진다면, 이 세상이라는 실재적 존재가 하나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것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종류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다른 육내입처(六內入處)로써 육외입처(六外入處)라는 세상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나도 이 세상도 모두 독립적으로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연기(緣起)하여 존재하는 인연(因緣)이 가합(假合)된 존재일 뿐이다. 나도 이 세상도 모두 마음에서 허망하게 만들어 낸 실체가 없는 것들일 뿐이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십이입처(十二入處)로 지각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십이입처(十二入處)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몸과 영혼은 있는가 없는가, 여래는 사후에 남아 있는가 남아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이러한 질문들은 세상, 영혼, 여래라는 것이 독립적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을 때만 가능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십이입처(十二入處)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외부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연기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들일 뿐이다. 육내입처(六內入處)에서 허망하게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애초부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 법상스님, <붓다수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