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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呼吸)을 챙기면 삶이 바로 선다

장백산-1 2021. 6. 14. 15:40

호흡(呼吸)을 챙기면 삶이 바로 선다


숲의 생명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고 맑은 바람을 통해 봄소식을 전해 듣는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한결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이런 날 숲 길을 거닐며 호흡을 바라보는 일은 그 어떤 종교 의식 보다도 더 신성하게 느껴진다. 내 나이만큼의 세월동안 숨을 쉬며 살았지만 이렇게 숨을 깊이 쉬어 보는 일은 근래에 들어와서다.

보통 우리는 몸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내 몸 밖에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몸도 외부의 대상도 그저 텅 비어 있다. 안고 밖이라는 분별(分別)이 공허(空虛)한 것이다. 법계(法界)에서 본다면 안이라는 것도 밖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호흡을 할 때 코나 입을 통해 공기가 움직일 뿐. 그저 저쪽 산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와 우리 뺨을 스치고 다시 다른 쪽으로 불어가듯, 우리 몸 또한 코나 입을 통해 바람이 인연 따라 불어오고 불어갈 뿐이다. 그 단순한 호흡이 얼마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별로 생각지 못한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냥 목숨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호흡관(呼吸觀)이 중요하다. 호흡지간에 생사가 달려있으며, 나아가 호흡지간 속에서 해탈에 이르는 빛을 발견할 수 있다. 호흡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일이며, 깨달음도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집중함으로써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체(一切)를 다 놓아버렸을 때,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는 들어오고 나가는 숨만이 적요한 침묵으로 피어오른다. 바로 그 숨을 놓치지 말고 관찰(觀察)해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 호흡과 직결되어 있다. 몸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을 때 가장 먼저 호흡 박동 수가 달라진다. 화가 날 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두근거릴 때, 술을 많이 먹어 흥분될 때, 몸에 해로운 음식을 먹었을 때, 많은 군중 앞에서 발표할 때, 혹은 마음 속에서 어떤 과거의 괴로운 기억을 떠올릴 때 등 일상적인 평상심(平常心)에서 벗어날 때 가장 먼저 호흡의 맥박 수가 빨라진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 쪽에서 여여(如如)함을 잃었을 때 곧장 호흡에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금 평상심(平常心)을 되찾고 나면 곧장 호흡이 가지런해진다. 명상이나 수행 중에는 일상적일 때에 비해 호흡이 가지런하고 길어진다. 이처럼 호흡이란 우리 몸과 마음에 아주 중요한 신호를 보내주는 기능을 한다. 호흡이 곧 우리 삶과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호흡이 가지런하고 고요하면 우리 삶도 고요해지지만,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에 변화가 잦으면 우리 삶의 풍파도 거칠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을 평화롭고 고요하게 만들려면 호흡을 잘 다스리면 된다. 우리 삶을 온전히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호흡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호흡을 잘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했던 호흡관(呼吸觀)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는 것, 들숨과 날숨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바로 호흡을 다스리는 방법이요, 나아가 삶을 온전한 정신 안에 곧추 세우는 방법인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면 저절로 빨라지던 호흡이 가지런해지고 이내 마음은 평온을 되찾게 된다.

 

화가 났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화에 정신을 빼앗겨 호흡이 가빠지는 줄도 모르고 화나는 대로 폭력도 쓰고 욕설도 하며 흥분하면서 화에 휘둘리고 만다. 아무리 화나는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크게 흥분된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기 어렵다. 화를 다스리려 해도 그것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니 화를 다스리려 애쓰지 말고 다만 호흡을 지켜보기만 해 보라. 당장에 일어나는 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려우니 화를 문제 삼지 말고 화와 함께 빨라지는 호흡을 챙기라는 말이다. 화가 나면 호흡이 가빠지게 되고 화가 가라앉으면 호흡도 다시금 평온해진다. 그러나 반대로 호흡이 가빠질 때 호흡을 잘 관찰함으로써 호흡을 평상심(平常心)으로 챙기고 나면 이내 몸도 마음도 본래의 평온을 되찾게 될 수 있다.

한 번은 우리 절에 다니던 초등학생 어린이가 찾아와 상장을 보여주며 하는 말이, 처음에 군내 피아노 대회에 나갔을 때는 너무 떨려서 제 실력을 못 발휘해서 3등밖에 못했는데 더 큰 대회인 도 대회에 나갔을 때는 순서가 돌아와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절에서 배운대로 호흡에 숫자를 붙이면서 한동안 호흡관을 하고 나갔더니 마음이 편해져 실력 발휘를 잘 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2등 상을 탓다고 자랑을 했다. 상을 타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호흡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게 별 얘기 아닌 것 같아도 호흡이라는 그동안 우리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작은 부분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중심에 서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할 것 같다. 호흡을 잘 챙기면 내 삶이 올곧게 챙겨진다는 이 말을 잘 기억해 두라.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처럼 대지의 바람이 코라는 문을 통해 들고 나듯, 우리 몸의 여섯 감각기관 즉 눈귀코혀몸뜻 또한 다만 나와 내 외부의 대상을 이어주는 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문은 안과 밖이 따로 없는 그저 인연 따라 열리고 닫기는 공(空)한 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실체가 이러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있고,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기관(六根)을 통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대상(六境)이 실체 없이 인연 따라 들어오고 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육근(六根)을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육경(六境)을 '상대'라고 나눌 것도 없다. 우리 몸도 공(空)하고 바깥 대상도 공(空)할 뿐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섯 가지 여닫이 문을 잘 관찰(觀察)해야 하고 그 여섯 가지 문으로 들락날락하는 것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들이 쉬고 내쉬는 호흡을 잘 관찰해야 하는 것처럼,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귀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혀가 무엇을 맛보고 있는지, 몸이 무슨 촉감을 느끼고 있는지, 생각이 무엇을 찾아 헤매이는지를 늘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잘 관찰하면 눈귀코혀몸뜻이 바라보는 대상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귀로 칭찬이나 비난의 소리를 듣고도 잘 관찰하게 되면 칭찬과 비난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서지만, 그 소리를 관찰하지 못하면 칭찬에 쉬 들뜨고, 비난에 쉬 가라앉는 나약한 정신으로 전락할 뿐이다.

 

성을 지키는 수문장이 졸고 있으면 성 안에 있는 온갖 금은보화를 누가 훔쳐 가는지 어찌 알겠는가.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기관을 잘 관찰하지 않고 놓치고 산다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이 여섯 가지 문을 졸지 말고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기관도 실체가 없고, 대상도 실체가 없으며, 오고 가는 것 또한 실체가 없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인연 따라 다만 변화해 갈 뿐이다. 바로 그 움직임, 변화를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랬을 때 안팎이 따로 없는 온 우주 법계의 본래 성품을 볼 수 있다.

 

알아차릴 때 우리 몸은 깨어난다. 알아차릴 때 우리 몸과 마음은 가장 이상적인 생명력으로 넘친다. 성 안의 모든 것들도 공하고, 성 밖의 모든 것들도 공하며, 성문으로 들고 나는 모든 것들 또한 공하고, 성문이라는 자체 또한 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안팎의 차별이 없기에, 내가 곧 우주가 된다. 여섯 문을 잘 지키라.

 -법상스님,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