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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

장백산-1 2021. 6. 30. 16:06

방하착(放下着)과 불교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연기(緣起)의 진리...삼법인(三法印)의 진리...사성제(四聖諦)의 진리...중도(中道)의 진리...공(空)의 진리...무상(無常)의 진리... 이 모든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 모든 가르침에 대한 충실한 생활실천 수행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因緣) 따라 잠시 잠깐동안 왔다가 그 인연(因緣)이 다하면 당연히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因緣)과 인연(因緣)들이 서로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因緣)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緣起法]

인연(因緣)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因緣)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느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諸行無常]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 따라 잠시 왔다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들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동안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착각(錯覺)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위',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내 집'... 등등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我相]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諸法無我]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분별하는 마음이야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人相]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分別心)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衆生相, 壽者相] 그런 수많은 분별심(分別心)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거래(去來), 주객(主客), 선악(善惡), 시종(始終), 음양(陰陽)...등등 수많은 극단(極端)의 분별상(分別相)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인연(因緣) 따라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거래(去來), 주객(主客), 선악(善惡), 시종(始終), 음양(陰陽).. 등등의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이지 혼자서는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因緣) 따라 '나무젓가락이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나무젓가락에는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한국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因緣)따라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거래(去來), 주객(主客), 선악(善惡), 시종(始終), 음양(陰陽).. 등의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양극단(兩極端)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中道)에서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正)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智慧)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없고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없고, 인연 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空)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고, 이슬과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올바로 보면 여래(如來)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것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이렇듯 불교의 모든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 한 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든 괴로움(苦)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올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올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집성제(集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의 소멸(消滅)이라는 지혜(智慧)가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올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고)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고)의 해결책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괴로움 소멸의 올바른 길이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道聖諦)를 8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八正道)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도성제(道聖諦), 즉 팔정도(八正道)를 가장 쉽게 풀어 말하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이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집착(着)을 비워버려라, 집착(着)을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심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동남아시아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고 말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방하착(放下着)하는 수행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심(執着心)'이란 놈입니다. '집착심(執着心)'을 내려놓고 가는 길이 수행자의 밝은 정도(正道), 즉 방하착(放下着)입니다.

2009.01.21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