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生)과 죽음(死)의 윤회(輪廻)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뭔가를 갖기를 원할 때,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 한, 뭔가를 갖고싶은 그 열망(熱望)은 그대를 계속 곤경에 빠트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열망(熱望)이 사라졌다면, 왜 그대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가? 열망(熱望)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여러 번에 걸쳐서 일어난다. 그대는 여전히 세속적인 행복에 관심이 있다. 아직도 열망(熱望)이 남아있어서 열망(熱望)은 그대에게 이렇게 외친다. “어디를 가고 있는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죽은 후 그대를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열망(熱望)으로 인(因)해서 자신 스스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자자신의 열망(熱望)이라는 다리를 건너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육체(肉體)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충족되지 않은 열망(熱望)을 품은 똑같은 마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세상 여행을 시작한다. 새로운 자궁(子宮)으로 들어가서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여행을 반복한다.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수단이 되는 죽음’은 사실 '진정한 죽음'이 아니다. 신비가(神秘家)인 카비르는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수단이 되는 죽음’을 ‘미완성의 죽음’이라고 불렀다. 미완성의 죽음은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미완의 죽음이다. 그대는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그대는 아직 지혜(智慧)로워지지 못했고, 진정한 죽음 성숙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아직 지혜(智慧)를 얻지 못했고 무르익은 죽음을 겪지 못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비례적으로 지혜(智慧)로워지는 건 아니다. 머리칼 희어진다는 것은 만물의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르는 것이지만, 지혜(智慧)를 얻는 것과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지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들끓던 열망(熱望)들이 사그라져서 모두 사라지고 들끓던 열망(熱望)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게 바로 지혜(智慧)다.
동물도 나이를 먹고, 나무도 나이를 먹는다. 그대도 나이를 먹어 역시 어느 날 늙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열망(熱望)이 사라지는 사람, 열망(熱望)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열망(熱望)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사람은 지혜(智慧)를 얻게 된다. 그런 사람의 죽음은 완전히 다르다. 카비르도 죽고, 붓다도 죽고, 그대도 죽는다. 그러나 그대의 죽음과 카비르의 죽음, 그리고 붓다의 죽음과 그대의 죽음 사이에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카비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지만 적절한 때에 알맞은 방식으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말한 바와 같이 카비르도 죽음을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죽음을 그런 예술로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삶을 예술로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런 의식이나 자각 없이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이 강물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것 처럼 그대는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 그대의 삶은 한 편의 비극이다. 그대의 삶은 예술이 되지 못했다. 그대는 발걸음을 떼기 전에,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다.
누군가 그대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왜 그랬던 겁니까?” 그러면 그대는 정말 아무런 답변도 못한다. 답변해주려고 준비를 해도, 그대의 내면(內面)에서는 그 준비가 전혀 답변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그대는 어둠속을 헤매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대의 삶은 예술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지, 진리(眞理)가 뭔지, 지복(至福)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 진리(眞理), 지복(至福) 이런 것들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평생 사막을 헤매고 산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대의 삶이 예술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삶이 예술이 되었다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 삶을 분명한 형태로 만들어서 갈고 닦으며 내적(內的)인 아름다움을 자신의 삶에 부여했을 것이다. 자기 삶에서 모든 쓰레기를 불태웠더라면 지금쯤 순수한 황금을 얻었을 것이다. 돌의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쳐냈다면, 석상 구석구석에 순수한 예술혼이 담겼을 것이다. 자기 삶을 아름다운 조각,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살면서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삶은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다.
카비르는 죽음마저도 완전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이 예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예술이다. 그리고 죽음은 하나의 시험이다. 그대가 올바르게 살았다면 올바르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 오쇼의 <초월의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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