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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장백산-1 2021. 11. 23. 14:41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 - 법상스님


'나'와 '나의 삶'은 둘이 아니다. 내가 삶이고, 삶이 나다. 보고 있는 것만 나가 아니라 보이는 대상 또한 나다.
왜냐하면 대상을 보는 있는 것은 보이는 대상에 의지해 있고, 보이는 대상은 대상을 보는 것에 의지해 서로가
연기적(緣起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이법(不二法)! 둘이 아닌 삶의 진실을 사람들이 망각하면서부터 괴로움, 두려움,외로움은 시작되었다.
내가 곧 삶이기에, 삶에 등장하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은 좋아서 취하고 어떤 것은 싫어서 버릴 필요가 없다.
취사간택하고 분별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마음 자체가 대상과 나를 둘로 나누는 분별심(分別心)일 뿐이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다. 주(主)와 객(客)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긴 뭘 받아들여?
그냥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저절로 자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가 하나를 경험하고, 하나가 하나에 용납되고, 하나가 하나에 포섭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사량분별하는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고, 또 세계와 세계를 차별함으로써, 
취사선택(取捨選擇)하는 습관이 있다보니, 바로 그 정신적인 분별의 습관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 두려움, 외로움이라는 
환상(幻想)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 바깥의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싸워 이기려 하거나, 도망갈 필요가 없다.
내 바깥의 그 경계(대상)이 그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 몸이 내가 아니라, 삶 전체가 바로 나다.

습관적으로 하던 분별만 하지 말고, 그저 그냥 있어보라. 물론 분별을 하고 살되, 그 분별을 실체화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을 생각을 필요에 따라 인연 따라 자유롭게 쓰되, 분별을 일삼는 생각에 집착해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저절로 받아들여진다.

받아들여진다는 말을 하지만 받아들여진다는 말 자체도 불이법(不二法))이 아니라 이분법(二分法)인 말이다.
받아들이는 내가 있고, 받아들여지는 대상이 있는 것은 진정한 받아들임, 즉 불이법(不二法))이 아니라 
이분법(二分法)인 말이다. 

그저 하나가 하나를 체험하며, 그 하나로 있을 뿐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그대로 받아들임이다.
본래대로 있는 것, 그것을 억지로 말로 표현해서 받아들여라, 분별하지 말라, 방하착하라, 있는 그대로 보라 등의 
다양한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하던 분별만을 하지 않으면 될 뿐.
그러면 나인 삶 자체가 삶 자체인 나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