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공부,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

장백산-1 2021. 11. 22. 15:24

별 없이 받아들이는 공부,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

내 생각이 좋아하는 것만 보려고 하는 것, 그것을 방편(方便)으로 아상(我相)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내 생각이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것, 그것을 방편(方便)으로 아상(我相)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아상(我相)은 언제나 자기 생각의 기준을 정해놓고 좋아하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린다.

언제나 사람들은 좋아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리는 아상(我相)의 이런 술수에 속아 놀아난다.
언제나 사람들은 아상(我相)과의 싸움에서 백전패배(百戰百敗)를 당한다. 언제나 아상(我相)은 '나'를 위하는 척, 
나를 돕는 척하면서 나타나 나를 집어 삼키는 뛰어난 재주꾼이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돌아 보라. 매 순간의 삶을 조용히 살펴보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무대는 언제나 
아상(我相)에 속아 놀아나고 휘둘리는 아상(我相)의 노예처럼 사는 곳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보고 싶은 것 보기 싫은 것,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등등의 양쪽을 분명하게 나누어 놓고, 분별해 놓고
그 중에서 좋아하는 것, 행복, 기쁨,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만을 미친듯이 좇아서 사는 삶이 우리의 삶이며, 아상(我相)에 속아 휘둘리며 놀아나는 삶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 불행, 고통, 원망, 절망, 슬픔, 미움, 좌절, 스트레스, 하기 싫은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아 왔다.
될 수 있으면 그것들은 안 하면서, 그것들을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해 가면서, 요리조리 최대한 머리를 굴려 피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불행이 쫓아올까 싶어 그야말로 노심초사하며 끊임없이 도망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왔다.

좋아하는 것, 좋은 것은 더 많이 가지려고 기를쓰며 살아왔고, 싫어하는 것, 싫은 것은 피하려고 거부하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싫어하는 것 싫은 것은 그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 애쓰고, 좋아하는 것 좋은 것은 쫓아가 내것으로 잡으려고  애쓰는 삶, 즉
도망자가 되는 삶 추격자가 되는 삶 이 두 가지 삶만을 쫓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 이와같은 두 가지 삶이 바로 투쟁의 
삶이고, 우리의 삶이 전쟁터가 되는 이유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삶이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추격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도망자도 바쁘고, 추격자도 
늘 바쁘다. 도망자도 초조하고, 추격자도 늘 노심초사한다. 도망자도 늘 괴롭고 추격자도 늘 괴롭고 힘에 겹다. 사람들은 왜 
그런 바쁘고 정신 없고, 두렵고, 힘들며, 초조하게 쫓고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런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게 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아상(我相)에 속아 살기  때문이다. 아상(我相)의 특성인 분별심
(分別心, 분별하는 생각) 차별심(差別心, 차별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상(我相)이란 언제나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 
놓고, 좋아하는 것은 쫓아가 내것으로 만들려 바쁘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는 멀리 도망치느라 바쁘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정확히 아상(我相)이 하는 짓의 전부(全部)다.

아상(我相)이 하는 짓에 매 순간, 끊임없이, 일평생을 속아서 노예처럼 사는 것이 바로 '나'다. 아상(我相)이 하는 짓이 곧 내가
하는 짓이라는 착각(錯覺), 즉 허망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아상은 언제나 나를 도우려고 그런다는 착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아상(我相)이 하는 짓을 내가 하는 짓으로 굳게 믿는 것이다. 아상(我相)을 신뢰한 결과는 죽을 때 까지 
도망자의 삶을 살거나 추격자의 삶의 살게 되어, 근심, 불안,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상(我相)에 속아 휘둘리는 삶, 근심 걱정 불안 초조한 삶, 도망자의 삶 추격자의 삶을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상(我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건 너무나도 단순하고 간단하다. 아상(我相)이 하는 짓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밥을 주지 않고, 아상(我相)을 신뢰하지 말고, 아상(我相)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 된다.

아상(我相)이 하는 짓이 바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나누고 분별하고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니, 지금 당장에 
아상(我相)이 하는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 놓고 좋아하는 것은 쫓고, 싫어하는 것에서는 
도망치는 것이니, 쫓거나 도망치는 이 두 가지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좋아하는 것, 행복,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 기쁨, 돈, 
명예, 권력, 지위, 재산, 사회적 영향력 등을 늘리는 것 등등 아상(我相)이 쫓는 것에 대한 중요도를 떨어뜨리면 된다.

이같은 말은 물론 좋아하는 경계(境界), 순경(順境)이 내게 다가올 때 그것을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일이 생긴다면 
마땅히 좋아하고  누리라. 순경(順境) 거기에서 벗어날 이유는 없다. 다만 거기에 미친 듯이 올인하지는 말라. 거기에 중요도를 
심각하게 부여하지는 말라. 좋은 일이 생기면 그저 담연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싫어하는 경계(境界), 역경(逆境)이 내게 찾아올 때 그것을 거부하지 말라. 싫은 경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벗어나려 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이 아상(我相)이 하는 짓이니, 아상(我相)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려면 아상(我相)이 하는 짓과 거꾸로 가면 된다.
역경, 불행, 슬픔, 좌절, 고통이 내게 찾아올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경계(境界)를 나누구 분별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습관적인 패턴에 제동을 걸고, 선택함이 없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심 없이 그저 통째로 받아들여라. 모든 경계(境界)를 분별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상(我相)의 농간이고,
통째로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본성(本性), 불성(佛性), 참나(眞我),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根源)이 하는 작용이다.

모든 경계(境界)를 분별함이 없이 선택함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건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생각 돌이켜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경계를 그저 그냥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의 전부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경계, 즉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분별하던 습관대로 늘 
받아들이던 것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무한(無限)하게 펼쳐질 수 있는 흥미진진한 영적 성숙의 그 모든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있다.

인간의 뇌(腦)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인간은 그 4,000억 비트의 정보 중 단지 2,000비트만 인식한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서 습관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나누고 분별해 놓고, 둘 중에서 좋아한다고 판단한 것만을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 중 단지 2,000 비트의 정보만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럼으로써 매번 똑같은 2,000가지의 가능성만이 현실세계로 지루하게 반복되어 이루어질 뿐, 나머지 399,999,998,000비트의 
무한한 가능성은 습관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생각 없이 마음만 활짝 열고, 과거에 만들어 놓은 
습관적인 분별심과 차별심만 내려놓으면,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눈부시게 펼쳐질 수 있는데도 습관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카메라는 분별없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담아낸다. 그렇기에 카메라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자동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별하여 둘 중에 관심이 가는 
좋아하는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욕망과 선호가 개입된 몇몇 가지만이 도드라지게 뚜렷이 보이고, 내 관심 밖의 대상들은 아웃포커싱 되듯 삶의 뒤편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서는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를 단지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 본다. 이 세계는 객관적인 물질적인
세계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장인 파동의 장(場)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관찰할 때 
가능성의 파동은 곧장 경험의 입자가 되어 삶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양자중첩(量子重疊)이란 말이 있는데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말로, 양자는 모든 곳에 
존재하다가 관찰하는 순간, 어느 한 위치로 고정되어 ‘입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파동의 가능성의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그렇게 보기로 의식하고 볼 때, ‘그런 현실이 창조(입자)’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경계,
외부에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의식의 투영’일 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견고한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사물이 아니라, 단지 무한한 가능성의 장일 뿐인 것이다.

이처럼 물질세계는 고정되어있는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가능성의 장, 파동의 장으로 존재하다가 인간의 의식이 비출 때 현실로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은 것들만을 분별하고 차별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똑같은 삶이 반복될 
뿐인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인생 변혁의 기회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습관적인 분별과 차별로써
언제나 2,000비트의 정보만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양자가 중첩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인 399,999,998,000비트의 정보로 
눈을 돌리고, 그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2,000 비트의 세계 매일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며, 전혀 새로울 것도 없이, 진부하고 틀에 갇힌 생활만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399,999,998,000의 무한 가능성의 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문 앞에서 그 무한 가능성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노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습관적인 차별심, 분별심과 아상(我相) 때문에 언제나 문을 꽉 닫은 채 무한한 그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늘 가난하던 사람이 의식의 변화와 동시에 부자가 되거나, 늘 실패만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성공을 하고, 깨닫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깨닫게 되는 이치가 399,999,998,000의 장이 열리는 이치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별심, 분별심과 아상(我相)에 얽매여 습관적으로 아상(我相)이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함으로써
399,999,998,000의 무한 가능성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아상(我相)에 갇혀서 습관적 패턴에만 갇혀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
법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깨달음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 영적 진보와 성숙의 가능성을 차단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가면 어떻게 해야 399,999,998,000의 무한 가능성을 펼쳐보일 수 있을까? 아상(我相)이 세상을 창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내면의 근원이 그 선택을 대신하도록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우주법계가 보내주는 무한한 가능성이 고스란히 내 삶에서 거침없이 
춤출 수 있도록 문을 열고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비워야 한다. 아상(我相)이 아닌 ‘공(空)’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상(我相)에 갇힌 분별심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상(我相)이 타파된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좋아하는것 싫어하는 것, 옳은 것 그른 것, 원하는 것 원치 않는 것, 보고 싶은 것 보고싶지 않은 것을 나누어 놓고, 습관적으로 
좋아하는 것, 옳은 것, 원하는 것, 보고 싶은 것만을 보던 습관을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나누지 말고 다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상(我相)이 하는 짓이 아니다. 분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드이는 것은 그것은 근원(根源)이 하는 작용이다. 바로 이 지점이 삶의 근원적인 전환과 변혁과 각성이 일어나는 분기점이다.

이 단순한 차이는, 사실 진리의 전부다. 이 단순한 섭수, 수용, 받아들임, 무분별, 무간택, 무차별을 실천하겠다고 용기를 내어 
피하지 않은 채 두 눈 똑똑히 뜨고 그 양 변의 경계를 다 분별없이 받아들일 때 그 때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우주적인 힘과 지혜와 자비가 깨어난다. 본래 주어져 있던 그러나 잠시 잊고 있던 그 모든 힘의 
근원이 비로소 깨어난다. 삶에 대전환이 시작된다. 완벽한 삶의 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업장소멸도 바로 이 순간에 찾아온다. 이 순간의 업장소멸은 그야말로 수미산이 무너져내리듯, 한꺼번에 무한히 큰 규모로 
일어난다. 매번 좋아하고, 원하고, 바라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역경, 불행, 좌절, 싫어하는 것들을 통해 얻고 
배울 수 있는 엄청난 공부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기만 해 왔던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주법계는 당신을 위한 완벽하고도 정확한 깨어남과 성숙과 자각을 위해신비롭고도 완벽한 삶을 준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는 언제나 그래왔다. 다만 내가 그 우주적인 협조를 받기를 꺼려왔던 것일 뿐이다!

우주법계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고 선택하고 차별하던 마음을 한순간에 돌이켜, 무분별로써 완전히 
받아들이게 될 때, 시간이라는 개념은 무너지고, 억겁에 걸쳐 일어나야 할 업장소멸의 지난한 여정이 단 100일 만에도, 49일 만
에도, 21일 만에도, 7일 만에도 아니 단 한 순간 만에도 찰나로써 끝나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상 본위의 삶에서, 우주법계 진리 본위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살아 왔던 아상과 에고의 삶에서, 근원에 내맡기고 우주법계가 
준비한 나를 위한 우주적인 삶의 계획에 완전히 나를 내던지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 위주의 삶을, '진리'에 내맡기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꾸라. 아상(我相)의 계획에 동조하는 삶 대신,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계획의 삶에 순응하라. 생각이라는 아상(我相)이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당신을 아상(我相)에 무릎 꿇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하겠지만, 그 유혹작전의 농간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단순하게 분별없이 삶을 통째로 받아들임으로.

진리를 어렵게 생각지 말라. 수행을 어렵게 생각지 말라. 신심명에서는 이것을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했다.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간택(분별)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도이며, 진리의 시작이자 끝이다. 수행은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하지 말고 완전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제 부터 삶을 잘 지켜보라. 경계(境界)가 올 때는 '경계구나' 하고 경계를 지켜본 뒤, 이 경계를 생각으로 분별하지 말고 고스
란히 통째로 받아들여라. 경계(境界)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을 말한다.
그야말로 일체 모든 외부적인 현상, 일체 모든 내부적인 현상  전부가 다 경계(境界)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심지어 마음속에서 생각 하나가 일어나든,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오든, 음식을 먹을 때든, 순식간에 좋거나 
싫다는 분별이 올라오고, 그 분별에 이끌리는 순간 좋은 것은 쫓고 싫은 것에서는 도망치고자 하는 아상(我相)의 속임수가 시작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비하고 있으라.

무언가 경계가 다가오면,  '경계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분별없이 그대로 받아들여라. 분별없이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공부를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라. 아니 매 순간, 활짝 열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 들어오는 모든 경계를 받아
들이라. 하루, 3일, 일주일, 21일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놓치면 놓치는 대로 다시 시작하면서 꾸준히 마음을 관찰하고 받아
들이는 연습을 해 보라.

그렇게 하면 삶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앗, 이것봐라.'하고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힘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좋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는 미세한 마음을 발견하고, 그같은 분별을 너머서서 고스란히 수용하고 받아
들이는 공부! 이것 공부가 당신이 평생 해야 할 공부의 전부임을 잊지 말라. 이 공부 말고 더 할 공부가 남았나? 없다.
여기에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이 다 담겨 있다. 

2011.03.23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