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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방(房), 수감자의 방(房)

장백산-1 2022. 2. 11. 17:14

스님의 방(房), 수감자의 방(房)

 

지금 저는 제 방에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많이 없다보니 새벽부터 방에 이렇게 앉아 혼자만의 그윽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법문을 듣기도 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망상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 없이 앉아 있는 이 순간이 제게는 그 어느 때 보다 충만하고 꽉 찬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저는 이런 순간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훼방 받지 않고 간섭 받지 않고 이렇게 이렇게 홀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멍 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이러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문득 한생각 떠올라 이렇게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영창(감방)이라고 부르는 곳에 위문을 다녀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수감자들이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때로는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어 보였습니다. 문득 떠오른 한 생각은 바로 이건데요, 교도소(영창, 감방) 같은 곳에 입감되어 있는 사람들 또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방 안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저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는 것 같더군요.

 

가만히 보았더니, 지금 제가 이렇게 기쁘고 평온한 마음으로 이렇게 방 안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그저 있는 이런 시간과 수감자들이 교도소 감방 안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찌보면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교도소에 수감되어 계시는 분들은 저와는 다르겠지요. 마음 자세가 다를겁니다. 수감자들은 아주 많이 힘들어 하고 계시거나, 심심해 하거나, 두려워하기도 하고, 우울해 하기도 하겠지요.

 

그같은 마음의 상태를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수감자 두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르겠지만, 한결같이 몇가지 다르지 않은 공통점에 한번 집중해 보자는 것입니다.

 

공통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방 안에 앉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할 일 없이 멍 하니 앉아 있다는 공통점도 있네요. 혹은 때때로 책을 읽을 수도 있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 방 안에 앉아 있다라는 물리적 현실만을 놓고 본다면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 방의 장판보다 교도소의 장판이 더 비쌀 수도 있지요. 어쩌면 서울 한 복판 아파트 방 안에 홀로 앉아 계시는 어떤 분보다 시골의 교도소에서는 더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비교 분별을 다 넘어서서 일단 방 안에 이렇게 앉아있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방 안에 앉아있다는 공통점에서는 저나 수감자 중 누가 누구보다 좋거나 나쁠 것이 없습니다. 똑같이 방 안에 앉아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두 사람 마음 상태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마음으로 현 상황을 그리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방 안에 앉아 있다라는 상황은 그냥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그저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상황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그저 방 안에 앉아있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다만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으로 과거의 기억을 동원하여 지금의 나 자신을 잘못을 저질러서 교도소 감방에 들어와 이렇게 괴롭게 비참하고 우울하게 앉아 있는 자신으로 해석하면서부터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할 뿐입니다.

교도소에 계시는 분들께 위로를 전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 두 상황을 한번 관찰해 보세요.

 

우리는 어디에 있든,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매 순간에 그저 그냥 있을 뿐입니다. 상황은 계속해서 변하고, 마음도 계속해서 변하지만,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 하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매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 있는 그대로의 있음입니다. 이러한 매 순간의 있음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는 아무가 없습니다. 문제가 시작되는 것은 이렇게 중립적인 있음의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생각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거나, 과거 기억을 가져와서 중립적인 있음의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현실을 좋다 싫다고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실상에 있어서는, 선방 스님의 무문관 독방과 교도소 수감자의 감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있는 입장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생각을 굴리지 않는다면, 현재를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두 사람은 그저 그렇게 방 안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괴로움 속에 있든 즐거움 속에 있든, 사실 그저 이렇게 있다라는 있음의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는 똑같습니다. 하나도 차이날 것이 없지요. 문제는 이 있음의 자리를 생각을 굴려 해석하고 판단하면서부터 시작될 뿐입니다.

 

옛날 스님들 중에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이 되거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신 스님들이 교도소를 국립선방이라고 말씀한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있음의 자리에서는 여기가 거기고, 전혀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누구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있음의 자리에 있게 될 때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위치에 있든, 내가 누구이든,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일지라도 언제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이 하나의 있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있음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즉각 진리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2015.06.03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