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2)
사상(四相)은 내가 다른 것과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錯覺)
사상(四相), 즉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네가지로 구분
아상(我相)이 모든 고통의 근원… 인상 ‧ 중생상 ‧수자상은 분별에 따른 군상
나와 세계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기에 하나…사상 비워야 성불도 가능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은 나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네 가지 욕망과 집착의 함축적인 표현이다.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라.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으로 불리는 사상(四相)을 인간이 지니고 있으면 그 사람은 보살이 아니라고 한다. 사상(四相)은 무엇이며, 왜 사상(四相)을 버리지 못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선 상(相)이라 함은 마음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잘난체하고, 아는체하고, 으스대는 소위 자존심의 행태를 말함이니, 상(相)은 생각을 하거나, 업력(業力)과 습력(習力) 즉, 본능적으로 나오는 습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상(四相)이란 나의 내면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네 가지의 욕망 즉, 4 가지 집착을 말한다. 사상(四相)은 서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나누었지만,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의 사상(四相)은 인간이 살아가는 중에 드러나고 있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4 가지 형태로 분별해 놓은 것이다.
첫째, 아상(我相)이란 나의 몸을 ‘나’(에고, ego)라고 생각하는 관념(觀念)이다. 아상(我相)은 사상(四相)의 바탕이 된다. 몸이 ‘나’이므로, 몸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몸의 욕망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고 또 모든 것이 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그러함에 이기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아상(我相)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고, 아상(我相)의 크기에 의해 각자의 생각, 성품,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아상(我相)은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된다. 내가 생각한다고 내가 원한다고 하여 모든 일이내 생각대로 내 원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 즉, 나를 나라고 하여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즉, 나에게 닥치는 모든 인연에 대해 아무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운명조차 비켜간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야말로 모든 고통을 극복하는 최고 지혜의 소유자이다.
둘째, 인상(人相)이란, 나는 너와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나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고, 너를 비롯하여 나 밖의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인식의 대상이다. 상대적인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본래 불이인 마가본심(摩訶本心)의 자성(自性)이 나와 너, 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가 있다는 증거이고, 만약 내가 없다면 내가보는 세계도 없다고 본다. 나와 세계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서 하나이다. 다만, 각각의 형상이 모두 다를 뿐이다. 연기적(緣起的)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와 우주는 삼라만상(森羅萬象)으로서 인드라 망(網)으로 서로서로 연결(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우주 삼라만상이 인드라 망으로 연결되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기적 입장에 있으므로, 나의 의지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주체가 될 수 없고 그 뿐만 아니라, 연기적(緣起的)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는 하나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된다. 따라서 나의 주체는 내 몸이 아니라 불만과 괴로움이 없는 순수한 의식이고, 나 밖의 세상 모든 것 또한 순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므로 그 속에서 서로 한 몸으로 용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몸을 나라고 인식하면서 나와 너로 분리하게 된 것이니, 이 같은 분별과 차별된 생각이 온 몸과 마음에 똘똘 뭉쳐져 있으므로 서로 시비고락(是非苦樂)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은 나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매우 이기적인 인식을 하는 경향까지 있으니,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중생상(衆生相)이란, 육체와 영혼이 함께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말한다. 부처님은 각각의 모든 중생이 평등(平等)하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각각의 중생이 살아가는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자신이 짓는 업(業)은 각기 다르면서 각기 다른 업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추구하는 만큼 그 인과(因果)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슬픔, 불행의 무게가 똑같이 평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 그리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업(業)을 짓는 분별(分別)의 마음을 완전히 없애기만 한다면, 곧 부처가 되어 근심 걱정, 번뇌 망상,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모든 고통이 사라져서 생사(生死)가 없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중생이 각각의 차별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각자가 지은 업(業) 때문이다. 각자 스스로가 지은 업(業)의 크기에 따라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중생상(衆生相)은 아상(我相)과 같이 자기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는 관념(觀念)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이 없는 순수(純粹)한 마음만이 진정한 주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시비(是非) 분별된 의식이 곧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상(衆生相)이란 우리 모두를 일컫는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없는 영원한 자성(自性)을 찾는 노력을 하는 대신, 살아가는 속에서 기분이라고 하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찾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나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을 일삼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업성(業性)에만 도취되어 있으니, 계속적으로 인과(因果)가 나타나서 괴로움과 고통을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 영원히 육도(六道 -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아수라세계, 인간세계, 천상세계)를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해도 진리를 찾을 생각은 멀리하고, 기복(祈福)에만 매달리는 우스운 형태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중생상(衆生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나와 별개인 상대로 볼 것이 아니라, 나의 업연(業緣)에 의해 나타난 나의 업상(業相)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중생을 보고 좋고 싫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그 중생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나의 고락업(苦樂業)을 없애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만약 다른 중생을 나와 경쟁하거나, 적으로 보거나, 좋고 싫은 분별(分別)의 대상으로 보는 업습(業習)을 절대적으로 고쳐야 한다. 나의 고락업(苦樂業)이 다하게 되면 다른 중생들이 모두 중생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넷째, 수자상(壽者相)이란, 곧 얼마나 오래 살아가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내가 오래오래 살아야만 한다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귀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몸을 소중히 여기며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화가 나고 괴로워지게 된다.
이러한 수자상(壽者相)이 생가는 것은 인과(因果)를 모르는 탓이다. 다른 존재들 보다 우월하려는 생각 즉, 수자상을 갖는 것은 자기 스스로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채워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을 만끽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무게만큼의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과보(果報)를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수자상(苦樂業)을 비우기가 가장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4 가지 각각의 상(相)은 내가 다른 것으로부터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만들어 진 환상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결코 독립될 수가 없음이니, 그래서 남보다 더욱 존귀하다거나, 뛰어나게 좋은 것을 이룰 수가 없음이다. 더 좋은 것을 얻으려 하고 더 많은 욕심을 부릴수록 그에 따른 인과(因果)가 생겨서 얻은 만큼의 과보(果報)로 인하여 잃고 사라지는 고통과 괴로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니, 사상(四相)이란 참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비워야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져서 깨달음을 이룸이니, 근심 걱정, 우비고뇌(憂悲苦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상(四相)을 비우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음이니, 그 어떤 것보다 사상(四相)을 비우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곧 사상(四相)을 비우는 실천행(實踐行)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23호 / 2022년 3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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