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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의 뜻과 불교의 핵심

장백산-1 2022. 5. 20. 00:45

진언의 뜻과 불교의 핵심

불교에 있는 진언(眞言)은 그 뜻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진언의 뜻을 해석하지 않는 것일까요?

불교를 처음 마주하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아무 뜻도 없는 주문(진언) 같은 것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반복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 미신 같고, 사이비 같고,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지금도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불교의 진언(주문, 다라니)이 의아하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왜 불교에서는 아무런 뜻도 없는 진언(주문, 다라니)를 해석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저 독송만 하라고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진언을 생각과 개념으로 해석하지 말고 진언이 나오는 당처(當處)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요, 사람들은 어떤 말(언어)를 듣자마자 그 말의 뜻을 해석합니다. 특정한 단어는 특정한 이미지, 모양,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단어를 듣자마자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의 개념, 이미지, 모양, 의미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언어(말)을 방편(方便) 혹은 세속제(世俗諦)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말(언)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언어)는 진리(眞理)를 가리키는 방편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리 그 자체는 결코 언어(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진리(眞理)는 말이나 개념,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전부 특정한 모양이 있고, 특별한 크기도 있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제각기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다 언어(말)로 표현하는 겁니다.

상(相)과 상(相)의 타파

 

말과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 나름의 모양, 상(相), 이미지가 있으며,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사과’ 하면 곧장 우리 머릿속에 ‘사과’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사과라는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의 생각은 곧바로 사과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것이지요. 물질적인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곧장 우리 머릿속에 자기만의 ‘사랑’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랑’이라는 말, 언어가 담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들마다 각자 다르게 잠재의식에 저장이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한 이미지의 ‘사랑’을 떠올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사랑에 상처를 받아 본 경험으로 인해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라고 하며, ‘사랑’에 대해 다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녀간의 사랑이 먼저 떠오르고,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같은 종교적인 사랑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님의 자식 사랑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말, 언어는 하나이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각자 자기만의 ‘사랑’이라는 이미지, 의식, 개념으로 자기 안에 저장된 자기 식대로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이지만, 사람들 의식 속에 저장된 저마다의 사랑은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사과’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과를 별로 안 좋게 기억할 것이고, 사과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맛있는 이미지로 기억할 것입니다. 외국 사람이라면 ‘사과’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사과’라는 말에 담긴 이미지가 전혀 없을 수도 있겠죠. 이처럼 같은 ‘사과’라는 말, 언어가 사람들마다 다르게, 다른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모양이라고 하여 상(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상을 타파하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상은 다 허상(虛像)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이미지, 모양, 상(相)은 전부가 다 사람들에 따라, 자기 업에 따라 다르게 그려지기 때문에, 진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相)이 진짜라고 여기고 그 상을 따라갑니다. 다시 말해 그 허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죠. 과거에 B라는 사람이 A라는 사람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했고, 그 말이 A에게는 큰 상처가 되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습니다. A는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매우 떨어져 있었고, 스스로 무능하다는 것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능력이 없다는 그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은 정말 무능해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A에게 ‘무능함’이라는 말과 이미지, 상(相)은 너무나도 큰 상처로 기억되고, 인식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B라는 사람에게는 ‘능력 없다는 무능함’이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는 자주 쓰는 흔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훗날 A가 B에게 고백을 하며, 그 때 B 네가 A인 내게 했던 말이 너무 큰 상처가 되었다고 했더니, B는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B는 무능하다는 말을 그냥 가볍게 사용했고, 사실은 A를 매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능력있는 사람이었기에 큰 기대를 했고, 그 큰 기대가 조금 무너지니 그저 편하게 ‘능력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른 상으로, 다른 이미지로 인식이 됩니다. 똑같은 말, 언어이지만, 사람들마나 언어(말)을 쓰는 용법이나, 비중, 의미가 저마다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즉 언어와 상(相), 이미지, 인식은 사람들마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평소에 망각하곤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다른 사람도 똑같이 생각할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하는대로 다른 사람도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업이 다르고, 그래서 의식, 인식, 상도 다 다릅니다.

금강경의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는 말 처럼, 모든 상(相), 모양, 이미지는 전부 다 실체가 없어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상(相)이 진짜라고 여김으로써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괴로운 일들이 생겨납니다. 상에 집착할 때 곧 괴로움이 생겨나는 겁니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呂來)’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올바로 본다면, 곧장 여래를 보리라’ 즉, 모든 상이 허상임을 알아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면, 곧바로 깨닫게 됩니다. 곧바로 괴로움을 여의게 됩니다. 여래, 부처라는 것은 곧 괴로움이 없는 존재, 모든 상이 허상임을 알아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실체가 없는 허망한 분별심(分別心), 즉 식(識)

이것을 초기불교나 유식불교에서는 ‘식(識)’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모든 상(相)이 허망한 이유는, 모양, 이미지를 자기 식대로 인식(認識)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기억하는 모양, 이미지대로 자기의 의식 속에 저장을 해 두고는 그것이 옳다고 그 의식,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세계, 자기 의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식(識)을 의식(意識), 또는 인식(認識)이라고도 부르고, 불교에서는 알음알이, 분별심, 분별망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유식(唯識)불교에서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하여, 일체 모든 것들은 오로지 자기의 의식이 만든 것일 뿐이라고 설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의식으로 자기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똑같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회사를 매우 매력적이고 좋은 회사로 여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너무 힘들고 나쁜 회사로 여겨 퇴사를 꿈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회사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식, 의식으로 기억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이미지, 상으로 기억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두 형제도 한 명은 부모님을 원망하며 나쁜 이미지로 기억하고, 다른 한 명은 좋은 분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정치인에 대해 국민들은 극과 극의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특정한 정책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매우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매우 싫어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연예인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극성팬이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연예인만 나오면 재수가 없다고 여기면서 채널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 저마다의 이미지로 특정한 대상을 기억하고, 머릿속에 저장하여 의식합니다. 이처럼 모든 상(相)은 허망합니다. 이처럼 모든 식(識)은 허망하여 진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정한 언어, 말에 깃든 의미를 자기 식대로의 상과 식으로 기억하고 자기 식대로의 상과 식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상(相)과 식(識)의 허망(虛妄)함으로, 상(相)과 식(識)은 현실에서 언어와 말로 구현됩니다. 그래서 모든 말은 전부 다 방편(方便)일 뿐, 진실일 수 없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설하는 모든 말들, 즉 경전의 언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 또한 하나의 방편(方便)일 뿐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라고 설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의 가르침을 방편(方便)이며, 세속제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에 있는 진실을 가리킬 뿐이니, 언어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설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언어(말)들은 다 허망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설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方便)을 설하고 있는데, 그런  방편(方便) 중에 하나가 진언(眞言,주문)입니다. 진언을 해석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해석되는 모든 말들은 허망하게 기억될 수 있기 때문에, 진언이라는 수행 방편에서는 허망한 상(相)으로 저장되고, 허망한 식, 의식으로 기억되는 것을 애초에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지요.

 

‘옴 마니 반메훔’이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에는 뜻이 없다보니, 무슨 뜻인지를 이미지나 의식으로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옴 마니 반메훔’일 뿐이지요. 이것을 통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유도하고 있는 방편인 것이지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올바로 보면 여래를 본다는 말처럼, 언어와 말을 대하더라도 거기에 특정한 상이나 이미지,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그 말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를 보는 새로운 관점

이렇게 말하니 어떤 분들은, ‘그래서 뭘 어쩌라고?’, ‘수리수리 마하수리~ 라는 말을 상이나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부처가 될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요. 이 지점 여기가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불교를 세간, 세속의 법이 아닌 출세간법(出世間法)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그동안 이 세상에서 해 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그래서 출세간(出世間)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간(世間)에서만 살아봤지, 출세간(出世間)에서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거나, 출세간(出世間)은 생각조차도 해 보지도 못했다 보니, 출세간(出世間)이라는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이며, 그런 방식으로는 접근 해 본 적이 없는 접근법이거든요.

 

우리는 말과 언어를 듣자마자 그 언어의 뜻을 따라가고, 그 이미지를 따라가고, 그 언어를 자기 식대로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작용은 완전히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릴적부터 우리는 ‘사과’라는 말을 듣자마자, ‘사과’의 이미지를 상으로 그리고, 자기만의 사과에 대한 식, 인식을 저장하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세간(世間)에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이고 접근법입니다.

 

그런데 출세간법(出世間法)인 진리(眞理)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사과’라는 말을 듣고 사과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것이 옳다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장 중생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진실은 ‘사과’라는 이미지와 인식은 ‘100% 진실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과라는 말(언어) 속에는 사과가 없습니다. 사과라는 말(언어)을 듣고 머릿속에 그려낸 사과의 이미지, 상은 자기가 그려낸 사과의 상일 뿐, 진짜 사과가 아닙니다. 만약 사과에 대한 상이나 식이 그대로 사과라면, 평생 진짜 사과를 안 먹더라도, 그 상이나 식만 가지고도 사과를 먹은 것처럼 배가 불러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죠. 진짜 생생한 사과는 말이나 이미지, 의식이 아닙니다.

 

사과를 만나는 방법으로 우리는 사과에 대한 이미지와 의식을 통해 사과를 만나왔지만, 사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과의 영양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그저 사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곧 정견(正見)입니다. 바르게 보는 것이지요.

 

사과를 먹고 맛있다거나 맛없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과를 먹으면서 조금 전에 먹었던 귤과 비교하며 맛이 없다고 하거나, 전에 먹었던 사과와 비교하며 사과 맛이 별로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과 자체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허망한 분별의식으로 사과를 해석한 것일 뿐이지요. 사과를 먹는데 사과를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아침에 먹는 사과는 보약과도 같지만 저녁에 먹는 사과는 독과도 같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과거에 배운 지식, 의식으로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걸러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배가 고파서 사과를 먹으면서도 저녁 때 먹을 때는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의식, 분별의식으로 해석된 사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의식에서 만들어낸 찜찜한 느낌이라는 부산물까지 끌어안게 된 것입니다.

 

징크스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 골대를 맞히면 진다는 속설이 있는데요, 이런 속설이나 징크스를 믿는 사람이라면, 경기를 하다가 골대를 맞히고 나면 마치 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그 생각 때문에 더욱 더 침체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은 허망한 하나의 의식일 뿐임을 깨닫는다면, 골대를 맞히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사과로 돌아가 보죠. 사과와 귤을 비교해서 사과는 맛이 없다고 하는 것도 나만이 느끼는 하나의 비교분별심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귤보다 사과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비교해서 이것 보다 저것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느끼는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합니다. 이 분별심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의식, 식(識)입니다. 즉 식이란 곧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서 그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허망한 의식입니다. 허망한 의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은 나에게 선택되어진 취사심일 뿐, 절대적 진실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과 하나를 보더라도, 사과 하나를 먹더라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먹지 못하고, 온갖 생각과 의식, 이미지로 투영된, 덧칠해진 사과를 보고 먹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사과는 그저 ‘그것’일 뿐, 어떤 의미도 어떤 해석도 없고, 그저 우리는 먹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과에 뒤따르는 수많은 해석이나 개념으로 복잡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더라도, 그 욕을 듣고 그 욕에 대해 해석하고, 화를 내고, 미워하는 등의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연거푸 맞을 일도 없어집니다. 욕에 개념을 입히지 않고, 이미지를 덧칠하지 않고, 내 의식으로 분별하고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저 욕은 욕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소리 파장일 뿐입니다. 그 소리는 나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됩니다. 그 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해탈(解脫), 자유(自由)입니다.

 

해탈 자유가 되어 사람들이 상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의식을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면, 상, 이미지, 모양, 개념, 관념, 의식 등 그 모든 것들을 다 사용하고 살면서도, 거기에 집착하고 얽매여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할 일은 다 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내가 주인이 되어 써먹을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 개념, 이미지, 상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그 생각의 주인이 되어 써먹을 수 있게 됩니다. 비로소 진정으로 해탈(解脫)이 되고 자유(自由)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말(언어)와 소리는 해석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날 때, 거기에서 참된 진실을 만나게 됩니다. 괴로움에 빠져들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지관(止觀),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

 

한 발 더 나아가 볼까요? 어떤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볼 때, 어떤 일을 할 때, 모든 세상과의 마주침이 있을 때, 그 때 내 식대로 해석해서 그것을 판단하기를 멈추고(止) 있는 그대로를 보세요(觀). 그 말을 해석해서 듣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듣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의식과 알음알이로 거르는 작업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지관(止觀), 위빠사나입니다. 시비 분별과 비교 판단을 멈추고(止) 해석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보는 것(觀), 그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진언은 바로 그렇게 한 번 걸러서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을 애초에 하지 못하도록 걸러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진언은 그 어떤 이미지, 뜻이 없으니, 그저 하나의 말의 소리 파동일 뿐, 소리 파동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실된 말, 진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언은 해석하지 않습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이해, 의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方便)이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언이라는 방편의 수행법이 생겨난 이유입니다. 진언을 왜 해석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다가, 너무 멀리 와 버렸네요. 그러나 이 부분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도 하고, 앞으로 계속적으로 반복될 부분이기도 하니,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보시고 소화를 하신다면, 불교 공부가 더욱 쉽게 와 닿을 것입니다.

 

그래서 숭산큰스님은 외국인들이 ‘관세음보살’ 염불할 때, 발음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니, 네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염불이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코카콜라’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더라도 염불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옛 스님들은 ‘가나다라마바사아’를 반복해도 된다고도 하셨지요.

 

왜 그런지 이제 좀 이해가 가시나요? 그 말 뜻을 따라간다면, 코카콜라라는 이미지가 그려지겠지만, 그 말 뜻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코카콜라 라는 소리가 나오는 그 당처, 그 소리파장이 일어나는 본 바탕을 곧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코카콜라와 관세음보살은 말의 뜻을 따라가면 다른 것이지만, 코가콜라 관세음보살 그 소리가 나오는 자리, 그 소리를 듣는 자리는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관세음보살 그 소리가 나오는 근원, 당처, 바탕,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 상을 따라가지 않게 되고,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말씀처럼, 상이 상이 아닌 줄 알기에, 즉견여래하게 됩니다. 곧장 그 소리가 나오는 자리라는 본래의 바탕을 곧바로 보게 됩니다. 그 소리가 나오는 본래의 바탕 자리가 바로 우리가 불성, 본래자리, 본래면목, 주인공, 해탈, 열반, 반야, 보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2019.03.05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