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입니까?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또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는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 주셨어요. 제일 중요한 의문에 대한 질문인데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그 의문을 잊고 삽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너무나 당연히 의문이고 또 그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사람들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핑계로 그냥 내버려 둡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겠지요.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고 크게 마음을 내야 합니다.
누구나 내가 누군지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냥 이렇게 세상에 나왔으니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남들이 가는 길로 그냥 따라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열심히 살라고 하니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기는 하고, 세상 사람들이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고 하니 돈 버는 데 목숨을 걸기도 하고, 명예 지위 권력 사회적 영향력 지식를 얻으려 하다 보니 그같은 것들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렇기 때문에 삶이 괴로워지고, 온갖 집착과 애욕을 분별심을 일으키면서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뿌리(근본, 근원)은 망각하고 가지에만 정신을 팔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인생의 근원(삶의 근본, 삶의 뿌리)의 의미를 찾게 되고,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는 있는 건지, 왜 가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그같은 되물음이 곧 화두입니다. 그같은 화두 그 의심에 사무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체가 없는 꿈 환영입니다. ‘또한 나도 꿈이며 환영입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꿈 환영인 세상 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세상 나의 그 근본 자리는 한없이 고요하고 적적(寂寂)한 자리입니다. 한없이 고요하고 적적한 자리 그 자리를 확인해야 합니다.
한없이 고요하고 적적한 자리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 이 의문을 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이며,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쳐 간절한 마음과 하나가 된 것이 선정(禪定)이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꾸준히 참구해 나가는 것이 정진(精進)이며,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확연해 지고 세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를 반야(般若)라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의문을 확연히 풀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공통적인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의문을 풀수있까요? 그 방법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나는 무구인가를 자꾸 물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자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바깥에, 외부에 물으면 답이 안나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왜 바깥에 외부에 묻습니까. 나 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깊은 본성(本性, 근원, 뿌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분명히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를 내가 내 안에 물으면 내 안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안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사람들은 그 답을 바깥에다 묻고, 외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되었든, 선지식이 되었든, 스님들이나 교수님이 되었든, 심지어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 외부적인 것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불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방편)이라고 했듯이, 손가락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왜 묻는 것입니까? 나에 대해 모르니까 묻는겁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겠는데 답을 몰라요. 그런데도 스님들은 계속해서 나는 눅인가를 계속 물으라고만 하지 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답해 미치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모르니 갑갑하고 답답합니다. 나는 눅인가에 대한 답은 찾아야겠는데, 답은 안 나오고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예요. 바로 그 답답하고 몰라서 미칠 것 같은 ‘오직 모름’ ‘순전한 모름’ 그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 모르는 것이 잘 가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길이요, 사실은 모든 인류가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자 이제 법우님께서는 이 질문을 이렇게 진중하게 물어오셨으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 생에 돈, 명예, 지식, 권력, 사회적 영향력, 이성, 학력 등등 그런 사소한 것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신명을 바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답은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법우님 스스로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법상스님 저서 『 기도하면 누가 들어 주나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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